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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8. 4. 10:54

어느 부산한 술자리다. 이응이 무겁고 화난 얼굴로 내게 말한다. 네 그림은 리얼리즘이 아니야. 나는 반박한다. 리얼리즘이 뭡니까? 현실주의지요. 나는 초현실적인 것들로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이응은 그 특유의 굵은 주름을 접었다 폈다 하며 계속 반복한다. 네 그림은 리얼리즘이 아니야. 네 그림은 리얼리즘이 아니야. 네 그림은....... 잠에서 깬다. 꿈 참 리얼하구만. 내 그림들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리얼리즘은 형식이나 문체, 노선이 아니라 정신이다. 그렇다면 내 그림은 꿈 속, 이응의 말처럼 리얼리즘이 아닐 수도. 나는 무엇을, 왜 그리고 있는 걸까?(09)

자그마치, 이십칠 년 전 일기에 이렇게 썼었다. 축축한 사람을 빚어내는 비. 켜켜이 쌓여 털려지지 않는 빗소리들. 내일 나그네 같은 햇볕에라도 머리와 몸 그 외에 젖은 것 모두. 내놓고 서 있었으면. 바싹 말라 부서질 때까지. 그때도 지금처럼 못 견디게 비가 왔던가? 오랜만의 햇빛, 정말 바싹 말라 부서지고 싶을 지경이다.(05)

까페 마리에 관한 기사를 찾아 읽다, 대학생 시절 일당에 솔깃해 철거용역을 했었다는 기자의 이야기를 본다. 미국 <LA타임스>는 지난 6월 "대학생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용역 직원으로 일하는 내용을 담은 만화가 한국에서 출간될 정도로 등록금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며, 말미에 덧붙인다. "하지만 말리고 싶다. 등록금 때문에 철거 용역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10여 년 전 기자와 함께 인천 재개발 현장으로 달려갔던 합기도 도장 동기 가운데 한 명의 근황을 들었다. 그는 아직도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처음에는 망설여지지만 곧 익숙해진다. 상처 주는 일이 무덤덤해질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고.
철거용역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일도 끔직하고, 익숙해져 괴물이 되는 일 또한 끔직하다. 돌아본다. 나는, 익숙해져 그 누구에게 괴물인 건 아닐까?(04)

울고 앉아서 될 일이 아닌데 순간,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04)

와도 너무 온다 싶지만 비에 이렇게 지겹고 무기력하긴 처음. 아마도 집안에 창궐하는 곰팡이에 대처할 방도가 딱히 서지 않기 때문이리라. 태홍의 고군분투로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또 이사를 해아하나? 우울하다.(03)

운곡정雲谷停에 모여 술을 마신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동생의 아이폰으로 야광토끼, 라흐마니노프, 마르케타 이글로바, 쇼팽의 녹턴, 유라이어 힙 등으로 들락날락 신청곡을 듣는다. 누나가 묻는다. "지금 다 집어치우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 뭘 하겠어?" 태홍을 슬쩍 곁눈질하며 망설이다 답한다. "두루 돌아다니고 싶어요. 가방에 카메라, 노트, 엠피쓰리, 책 몇 권 넣고 방랑하듯. 생산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흐르듯."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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