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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0. 22. 11:23
30. 아침을 먹고 바퀴에 앉아 창밖을 본다. 멀리 이름 모를 나무의 노란 잎들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잎들의 순간이 하도 아름다워 코 끝이 찡하다. 저무는 것도 퇴색하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몰락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화려한 절정의 순간들임을 가을이 가르쳐준다. 아버지의 여든이 여든으로 절정인 것처럼. 저 가을, 다리가 성했다면 분명 저 풍경 속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우주에 하나 뿐인 장화를 신고 풀들을 헤치고 가며 원소리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위로한다. 바라보는 나도 이 순간도 온전하고 화려한 절정이라고.

29. 원소리로 간다. 이 길, 일 년여 만이다. 햇볕이 좋다. 가을이 깊고 가득하다. 차를 몰고 가는 원, 은행과 왕벚과 단풍과 낙엽송 등의 물들어 빛나는 잎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메 으째야쓰까이 저 단풍들! 운곡재에 도착하니 모두 나와 반겨준다. 만연한 가을과 손 흔드는 이들이 잘 어울려 울컥한다. 동생이 업고 집으로 들어간다. 가볍기를 바란다. 소파에 모여 앉고 서서 아버지 팔순 기념 사진을 찍는다. 독일에 있는 조카 외에 모두 모였다. 열네 잎이 모인 꽃 한 송이 같다. 음식이 차려지고 바퀴를 굴려 식탁에 자리잡는다. 진수성찬이다.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든다. 자격지심인가 조금 어색하다. 담배 피우러 가는 동생을 따라갈까 하다 굴러가야해서 참는다. 막걸리 세 잔 마시고 엉덩이를 식히려 아버지 침대에 모로 눕는다. 거실에서는 웃음이 팡 팡 터진다. 슬픔에 대해 생각하다 접는다. 적당히 쉬고 다시 술자리에 끼어 맥주를 마신다. 어느새 밤이 깊다. 리겔이 베텔기우스가 낙엽송숲 위에서 반짝이려나.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별에서 온 면면들을 본다. 이 인연은 뭘까. 이 끝 모를 우주 중에 단 한 자궁에서 비롯되어 피를 나눈 이 인연은. 인연을 하찮게 여기곤 했던 나, 눈물을 참고 거두고 농을 친다. 지금의 내가 전혀 특별해지지 않는 이 인연이 고맙고 고맙다.

26. 온 : 엄마, 엄마는 나 빼고 가까운 남자랑 잘 안 맞나 봐.
원 : 그게 무슨 소리야?
온 : 엄마 아빠는 죽었고 남편은 다쳐서 병원에 있잖아.
원 :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온 :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쫌 잘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원 : 잘 해준다니 고마워. 근데 너 혹시 그런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온 : 부담감은 없어. 아니 아니, 아주 쪼금은 있어.
원 : 아들, 그런 부담감 갖지 않아도 돼. 엄마는 좀 오래 살아서 힘든 일이 있어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란 게 있거든. 엄마 걱정 말고 너는 그냥 즐겁게 지내면 돼.
온 : 그럼 엄마, 나 부담 갖지 않을 테니까 포켓몬 카드 한 팩만 사주라.

25. 비소리가 들린다. 아득하고 멀어 꿈인가 하였으나 깨니 새벽이다. 말 없이 어둡다. 커튼 너머 너머에 있는 창으로 돌아 누워 귀기울인다. 차분히 위로하듯 내린다. 내가 곧 너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가 마음에 차곡 차곡 쌓인다. 이제 진정 비와 걸을 수는 없는 건가. 웃음이 난다. 저 검은, 비 내리는 새벽을 나는 새들도 있겠지. 얼마나 많은 깃털들이 떨어지려나. 눈물이 난다. 문득 왜, 북극에 가고 싶다. 비와 함께 새들과 함께 깃털도 함께. 찌르고 빠지는 이런 생각들은 허황하여 믿을 수 없는 것. 그래도 이 새벽이 길고 길었으면 좋겠다. 북극으로 가 흐르는 빙하 하나 골라잡아 올라 탈 수 있는 시간만큼.

24. 점심 먹고 옥상에서 볕을 쬐는데, 하늘은 왜 이리 티끌도 없이 맑고 푸른 거냐. 아- 쓰벌!

21. 스님 왈, 상황과 몸을 추스리느라 애쓰며 일 년을 보냈으니 이제 아프다고 자신에게 말하라 한다. 고통스럽다고 고백하고 눈물을 참으려 하지 말라 한다. 아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보라 한다. 깨달은 척 숨지 말라 한다. 마비 된 다리가 아픔을 느끼지 못해 상처가 나고 곪고 터지도록 모르는 것과 같이 마음 또한 그러하단다. 긍정으로 무마하거나 어설픈 희망과 타협하지 말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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