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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0. 13. 13:20
14. 점심을 먹고 옥상에 올라 볕을 쬐고 있었다. 층꽃풀의 연보라 꽃들은 다 지고 산국의 노란 꽃봉오리가 곧 터질 듯 팽팽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 오늘이 그날이로구나. 그날, 오빈리 현장 주변에도 산국이 점 점 점 수백 점의 봉오리를 맺고 있었지. 그 산국들, 추락하는 나를 보았을까? 깜짝 놀라 뜻하지 않게 일찍 꽃을 터트린 녀석도 있었을까? 집을 짓다 뚝 떨어져 등뼈가 부러지고 신경이 끊어진지 오늘로 딱 일 년이 되었다. 그동안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원은 홀로 삶을 견디며 투쟁하듯 사느라 몸과 마음이 상했다. 나는 아직 병원을 전전하고 있고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국가 공인 일급 장애인이 되었다. 일 년 전에 아침 먹고 나선 집으로 여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보내면서 절망을 여의었고 희망에도 구구절절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순간 순간의 온전한 나와 만나려 애썼다. 그렇게 삼백육십오 일이 지나갔고 소위 일주년이 되었다. 명색이 일주년인데 어찌할까? 삶이 본격적으로 바뀐, 다른 우주로 건너 온 중한 날이라 여기고 오늘을 기념해야 하나?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기념하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고마운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 세세하게 고마워하기로.

13. 저녁을 먹고 휴게실 기립기에 서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받으니 온이다. "아빠, 오늘 운동 힘들었어? 오늘 고단했어?"라 묻는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하자 온이 말을 잇는다. "그래도 노래 불러줄게. 옥달의 수고했어 오늘도야. 이 노래 알지? 자, 부른다.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울컥한다. 한 번 더 부탁하니 친절하게 다시 불러준다.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감동적이라고 고맙다고, 너의 응원이 내겐 천군만마라며 고마움을 전하자 아이는 히힛 - 웃으며 좋아한다. 땡큐, 온.

12.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노란 토끼 한 마리, 신경 한 다발을 들고 서 있다. 언제 눈이 내렸는가, 토끼 뒤로 설경이 환하다. 세상은 아무 흠집 없는 도톰한 백지 같다. 토끼는 하이, 인사를 하고 걸어 들어와 신경을 화병에 꽂는다. 워러 프리즈, 물 한 잔 마시고는 바이, 문을 열고 나가 눈 속으로 사라진다. 누가 다녀갔는가, 발자국도 토끼를 따라가 세상은 다시 백지다. 바퀴에 앉아 신경 한 다발을 바라본다. 이것들이 없어 내가 굴러다니고 있단 말이지. 신경들이 꼼지락거린다. 자주로 주홍으로 보라로 분홍으로 훌렁 훌렁 색을 바꾼다. 한 가닥 한 가닥 살아 있는 생물 같다. 어? 어, 신경들 가닥마다 끝에서 무언가 올라와 맺히더니 팝콘처럼 터져 몽긋 몽긋 꽃이 된다. 꽃 한 다발이 된다. 집이 환해진다. 등을 열어 너를 심어볼까 그럼 내 다리에도 꽃이 필까, 화병을 보고 있는데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붉은 토끼 한 마리 껑충 들어와 신경을 화병에서 꺼내 들고 나간다. 눈은 다 어디 갔는가,  밖은 오색창연 꽃들의 세상이다. 토끼가 신경을 꽃들 사이에 심으니 모든 꽃들이 어화, 춤을 춘다. 어디에 심은들 어떠하리, 내 다리도 움찔,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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