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

노트 2021. 1. 14. 21:26

01  컴퓨터 앞에 앉아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사업 공모 안내문을 들여다보며 장애예술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세탁기에서 띠리 리 띠 릴리 - 세탁 종료 안내음이 들려왔다. 새 다이어리에 양가 직계존비속의 생일과 기일 등을 체크하고 있던 아내가 아이를 불렀다.

“아들, 빨래 좀 널어줘. 부탁해.”

방에서 뒹굴뒹굴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이가 소리쳤다.

“나 말이야?”

그럼 우리 집에 아들이 너 말고 또 있냐며 재차 부탁하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은 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큰아들도 있잖아. 저기.”

인정 어 인정, 내가 킥 킥 웃으며 아빠 지금 고민에 빠졌으니 혼자 널라고 하자 아이가 변성기 전의 목소리를 내며 애교를 떨었다.

“에이~ 형! 야일이 형! 같이 널자. 형제지간에.”

 

02  엄마가 전화하셔서 말씀하셨다.

외숙모가 내 스마트폰으로 너 그거, 전시하고 나서 인터뷰냐 뭐냐 그거 한 거 보여주더라. 니 얼굴 나오고 사온이 어릴 때 홍천에서 유모차냐 뭐냐 그거 태워주던 사진도 나온 거. 그거 읽다 보니까 눈물 나더라. 힘들었을 텐데 좌절하지 않고 잘 살아줘서 고맙더라. 고마워. 은영이 한테도 고맙고. 아픈 데는 없고?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고맙다. 잘 이겨내줘서.

 

03  아내가 말했다. 나는 집이 평지에 있는 게 좋은데 뷰도 무시할 수 없고. 해서 생각해봤어. 집을 3층으로 짓고 루프탑 만들고 집 안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거.

어제 보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먼 다큐멘터리 영화 [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이차크 펄먼 다큐 영화에 나오더라. 펄먼이 소아마비여서 양쪽에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전동 휠체어를 타거든. 근데 지금 사는 그 사람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더라.

잠시 후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우리 집에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볼까?’라는 포스팅을 공유한 것. 읽어보니 일반 주택 소형 엘리베이터 제작에 대략 3,000만원이 소요된다고. 상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보는 광경.

 

04  넉 달 만에 다시 붓을 잡았다. 넉 달 동안 내게 무슨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하다. 우야든동 달려야 하지만 겨울 봄 여름 가을, 1년 내내 할 일이 명확해 나쁘지 않다.

 

05  재활운동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쐰다. 햇빛에 미간을 찌푸리고 바람에 귀가 시리다. 그래도 좋다.

 

06  지난 해 말 약 두 달 동안 매달려 그려놓은 밑그림 중 처음으로 캔버스에 옮길 그림을 찾는데 마땅한 것이 없다. 밑그림을 그릴 때는 완성본이라고 따로 ‘complete' 폴더에 모아 놓은 것들인데 막상 그리려하니 흡족하지 않다. 엊그제만 해도 1년 내내 쉬지 않고 할 일이 있다며 나름 든든했는데 순간 두려워진다. 난 그림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07  어젯밤 자정이 다 되도록 아이와 속닥이다 잠들었던 아내에게 둘이 뭔 수다를 그리 떨었느냐고 물었다. 아내 왈,

엄마 학생 때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봅디다. 초․중․고․대 시절을 일목요연하게 축약해 보고해드렸지. 그랬더니 이러질 않겠소.

- 근데 엄마, 연애 얘기가 없네?

- 연애? 아빠가 처음이었으니 연애랄 게 없어. 그러네. 그렇게 살았네. 그 젊고 예쁘던 시절에 연애도 한 번 안 해보고 뭐했는지 몰라.

- 뭐 좀 평범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거지. 첫사랑과 결혼했으니까.

- 좋긴 뭐가 좋냐! 아빠처럼 연애 좀 해볼 걸. 억울해. 아쉬워.

- 난 아빠가 불쌍하던데.

- 불쌍하다고? 아빠가? 왜?

- 사람하고 헤어지는 건 힘들고 슬픈 거잖아. 근데 아빠는 엄마 만나기 전에 다섯 번 연애했다고 했으니까 다섯 번 헤어졌다는 거고, 다섯 번이나 힘들고 슬프고 마음 아프고 눈물 나고 그랬을 거 아냐. 그러니까 불쌍하고 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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