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3

노트 2017. 9. 24. 20:12

27  아침마다 노래를 틀어 아이를 깨운다. 오늘은 3호선버터플라이의 ‘할머니가 피었어요’와 ‘안녕, 나의 눈부신 비행기’를 들려주었다. 노래를 들으며 잠에서 깬 아이가 말했다. “아빠, 오늘 선곡 좋은데?”


24  2009년 아이가 태어난 날부터 2011년까지의 ‘사온일기’를 정리해 세 권의 책으로 묶은 뒤, 손을 놓고 있다가 박차를 가해 드디어 마침내 파이널리 엣 라스트 기어이 2016년까지 정리를 끝냈다. 출력소에 원고와 표지 다자인을 보냈으니 며칠 후 책 형식으로 제본된 일기 다섯 권이 집으로 올 것이다. 퇴원하고 바로 시작한 일이니 대략 다섯 달이 걸렸다. 일기를 정리하며 울고 웃었다.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비감한 면이 없지 않았다. 되도록 내 감정과 생각을 배제하고 아이의 말과 행동들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내 시각과 느낌과 생각이 바탕과 뼈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분명 아이의 입장이나 생각 그리고 기억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들이, 내 관점으로 쓴 이 일기가 아이의 기억을 조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훗날 아이가 자신의 기억을 이 일기에 맞추는 것은 아닐까 내내 의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도 그 의문과 걱정의 유혹을 물리치고 끈질기게 여기까지 왔으니 일면 대견하기도 하다. 아이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가능했을 것이다. 애초 목표대로 아이 열 살까지는 계속 쓸 것이다. 그때, 이후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그리고 이 기록을 아이에게 줄지 아니면 폐기할지는 천천히 길게 그리고 평안하게 고민해 볼 작정이다.


22  인간의 죽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타임>지가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그가 세계 곳곳에서 임종 환자들이 겪은 2만 여 건의 근사체험을 연구하고 쓴 [사후생-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을 읽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죽음은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다. 죽음과 동시에 지난 삶의 모든 사건과 고통과 사유로부터 벗어나 텅 빈 순수의 에너지가 된다. 믿거나 말거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셀 수도 없는 처참하고 불행한 죽음들을 생각하노라면.


21  띵똥. 문자가 왔다. 여주 사는 이응이 수원에서 일을 하다 비계에서 떨어져 입원했다는 단체 문자였다. 순간 내가 다치던 그 날이 떠올랐고 ‘안 돼.’ 한마디 뱉었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응이 통화 가능한 상태인지 알 수 없어 먼저 치읓에게 전화했다. 고정이 안 된 2층 비계발판을 밟아 떨어졌다며 부상이 중하지 않으니 전화 통화는 가능할 거라 했다. 바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응에게 전화했다.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고 허리가 아프지만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만하면 다행이지.’ 심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쾌유를 빌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다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가슴 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치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공감 하나 새로 장착한 것인가?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102  (2) 2017.10.12
17101  (0) 2017.10.02
17092  (0) 2017.09.12
17091  (4) 2017.09.01
17063  (2) 2017.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