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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8. 2. 7. 17:01

10  열흘 간 브람스의 곡을 들었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 E단조 Op.38>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Op.77>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3번 D단조 Op.108>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인터메쪼 Op.117>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Op.15>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A단조> <피아노 4중주 3번 C단조 Op.60>


09  일어나니 눈이 내리고 있다. 아침  동을 하고 컴퓨터를 켠다. 듬성듬성 가늘던 눈이 굵어져 함박 함박 빼곡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문득 손성제의 [비의 비가] 앨범을 찾아 재생시킨다. 아침 준비하고 있던 원이 말한다. “참 속절없다는 생각이 드네. 지금 내리는 이 눈과 이 노래와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이 아무런 연관도 없이 어울려 흘러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속절? 정확히 무슨 뜻일까 찾아본다.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눈을 본다. 원이 말대로 눈이 노래가 시간이 참 속절없다.


08  매일 5시 40분에 일어나 소변을 뽑고 양 발을 마사지하며 음악을 듣는다. 오늘은 브람스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20, 1번. 음의 순간 순간을 따라다니며 집중해 듣는다.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어울려 부드럽다. 하루가 몽글몽글 부드러워질 것 같은 느낌이다. 분리되어 있는 내가 합일 하는 길 중 중요한 한 갈래는 아마도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을 사는 것이리라.


07  멀티플레이어라는 자신감도 오해였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것일 뿐. 어느 순간에도 살지 않았던 거다.


05  눈을 뜨니 달빛이 침대 끝과 방바닥에 창문 모양을 그리며 비추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니 교교한 달이 둥그렇다. 보름에서 하루 이틀 지난 모양이다. ‘돈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지’라던 마가렛트 여사의 말에 빗대어 생각한다. 달의 존재 형태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달을 보고 그 빛을 받고 있다는 것. 소변을 뽑고 브람스의 첼로 협주곡 1번을 듣는다.


04  지난한 삶에서 나를 구한 건 글쓰기였다고 간혹 생각하곤 했는데, 어쩌면 오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한 게 아니라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그 관념을 통해 나를 속여 왔는지도. 원에게 묻는다. “글쓰기는 내게 도망이었을까? 위로였을까?” 원이 말한다. “위로였을 거야. 혹 도망이었더라도 그건 살기 위한 것이었을 테니 당신을 살린 거지. 그래서 위로인 거고. 아닌가?”


02  아로마 수업을 받고 온 원이 말했다.“당신의 부정맥과 머리에 몰려 있는 기운과 비듬 있잖아. 스트레스 때문인 거야. 분명 예민한 사람이라 엄청 긴장하며 살면서도 둔감한 척 그 스트레스를 미소 속에 숨기고 살았던 거지 그래서 몸이 힘든 거지.” 처음에는 갸웃거리다 곰곰이 뒤돌아보니 원의 말대로 삶 자체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완된 적이 없던 삶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무의식적인 죄책감, 태어나 집을 나설 때까지 계속된 아버지와의 관계, 왜소한 체구에 대한 스트레스, 모든 사람과의 만남에서 오는 긴장감, 책임지지 못하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 등등. 고비 고비마다 긴장에 절어 자신을 책망하던 내가 보였다. 그랬구나.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며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구나. 내 삶 전체에 스트레스가 박혀 있었던 거구나. 그렇게 처음으로 긴장 덩어리인 나를 만났고 그 긴장을, 스트레스를 인정했다. 내가 안쓰럽고 가여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01  보행훈련로봇인 웨어러블 훈련 1주차 마지막 날. 기립과 균형 잡기, 제자리 걷기 끝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어 5미터 1회 왕복. 쓰러지지 않으려 지팡이를 꽉 쥐고 있던 손아귀에 쥐가 돌아다니고 팔뚝이 힘들어했다. 2년 1개월 보름 만에 서서 걸은 감흥? 글쎄 잘 모르겠다. 내 신경으로 뼈와 근육과 피를 움직여 걷는 게 아닌지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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