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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8. 2. 8. 22:33


20  나긋하고 조용하게 눈이 내린다. 병원의 커다란 창에 붙어 앉아 눈 쌓인 나무와 산과 길을 내다보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로 듣고 있다. 따뜻한 햇볕이 무릎으로 스며든다. 연말까지 보름동안 1번부터 6번까지 줄창 되풀이 해 들을 것이니, 내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마도 눈 내리는 겨울의 따뜻한 설경과 함께 기억 될 것이다.


17  다치고 나서 그 고통 속에서도 끝내 절망하지 못한 것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 분리된 채 관조적으로 바라보던 나 때문일까?


16  영화 [좋아해, 너를 Their Distance]의 마지막 부분. 사랑의 감정을 쓸쓸하게 건너온 레온이 말한다. “괜찮아. 사랑했으니까.” 순간, 오래전 시옷의 말이 떠오른다. 이응과 사랑하러 가야한다고 했을 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가 말했었다. “형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솔직히 형도 알고 있지 않아요?” 붙잡으려는 그의 작은 눈을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서 종로2가 횡단보도를 건너갔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면서. 생각한다. 그래, 내 불행은 나만 짝사랑했을 뿐 그 누구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


13  장콜을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기사분이 말한다. “주말에 태백산에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간 설산이었는데 풍경이 죽이더라구요.” 순간 생각이 다리를 이끌고 눈 덮인 하얀 산으로 간다. 치악산, 소백산, 오대산, 북한산, 한라산 윗새오름과 사라오름에 발자국을 남긴다. 흰 눈 밭에 푹 푹. 차갑다.


11  자고 일어났더니 왼발 엄지발가락과 이불에 피가 묻어 있다. 짚이는 바가 있어 어렵사리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발을 포개고 자다 왼발 엄지발톱이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를 긁으며 파낸 것. 아픔을 모른다는 게 진정 아픔이다.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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