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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8. 3. 14. 15:54

19 그러나 목에 걸린 줄이 길다고 해서 개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전성원 길 위의 독서300


17 산책




16  꿈을 꾼다. 비가 오는 어둑어둑한 아침이다. 여인 몇몇이 처마 밑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 시나브로 날이 밝더니 어느새 햇살이 골고루 비추는 맑고 화창한 아침이 된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는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며 영롱하다. 여인들은 신기해하며 처마 밖으로 나가 비를 맞는다. 비를 받아 먹는다. 그러고는 허밍을 하며 춤을 춘다. 여인들의 얼굴도 보석처럼 빛난다. 비는 그치지 않고 햇빛도 그치지 않고 내린다.

15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밤새 토독 도 독 내리던 비가 여전하다. 휠체어로 옮겨 앉아 소변을 뽑고 멍하니 비의 소리를 듣다 다시 매트 위로 올라간다. 발을 마사지하며 오늘은 무슨 음악을 들을까 유투브 관심동영상 목록을 뒤적이다 아르보 패르트의 [Tabula Rasa]에 수록된 ‘Silentium’을 재생시킨다. 고요하고도 날카로운 고음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두 대의 바이올린의 섬세함과 고인 물에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연상시키는 프리페어드 피아노 소리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해서 명료한 긴장감이랄까? 무심결에 이 곡을 선택한 이유가 어쪄면, 올 처음 만나는 봄비에게서 명쾌한 긴장감을 느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14
  스티븐 호킹 박사가 이 생을 마감했다. 그와 그의 이론에 대해 단편적으로 듣고 보기는 했으나 일목요연하게 묶어 본 적이 없다. 우선 그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쓴 『위대한 설계』를 구입해 읽어봐야겠다. 평안히 잠드시길.

덧. 영화 「동주」를 보다 문득 생각했다. ‘윤동주, 그가 정말 저렇게 사라진 걸까? 이걸로 그의 생이 진정 끝난 걸까?’ 스티븐 호킹의 타계 소식을 들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는 이 죽음으로 정말 그가 탐구했던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진 걸까? 영면에 든 걸까?


12 「파울 첼란은 자신의 글을 ‘유리병 편지’라고 불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가 읽게 될지, 과연 온전하게 전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험난한 파도와 암초를 뚫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닿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에 띄우는 편지가 유리병 편지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듯 망망대해의 저 너머에서 온 유리병 편지를 집어드는 것과 같다.」 전성원 『길 위의 독서』 6쪽


「12세기의 스콜라 철학자이자 신비주의 수도사였던 생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고향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초심자일 뿐, 어느 곳엘 가도 고향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 완벽에 이른 사람은 온 세상을 낯선 곳으로 느끼는 사람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전성원 『길 위의 독서』 7쪽


11  핸드폰 손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소변을 뽑은 뒤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 어제 저녁에 옥천군에서 올라와 광어회에 소주 몇 잔 마신 su가 자고 있어 거실로 나가지 못하고, 주말이면 내 옆에서 잠을 자는 아이가 매트에서 곤히 잠들어 있어 아침운동도 하지 못한 채. su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집을 나서 어디에서 자든 일찍 일어나 숙박지가 있는 낯선 마을을 산책하곤 했지. 묵호에서, 거제에서, 진안에서, 홍천에서, 상계동에서, 강진에서, 화천에서, 광주에서, 구의동에서, 대진에서, 무안에서, 정동진에서, 정선에서, 용인에서, 여주에서, 강화에서, 덕소에서, 사천에서, 춘장대에서, 속초에서, 어여진에서, 외나로도에서, 병천에서, 울릉도에서, 관산동에서, 무주에서, 아산에서, 여천에서, 포천에서, 내곡동에서, 월령리에서, 경포에서, 숭뢰리에서, 대추리에서, 삼척에서, 연평도에서, 백령도에서, 용천리에서, 춘천에서, 지평에서, 이천에서, 수락산역에서, 의정부에서, 속초에서, 그 외의 등등에서....... 그때는 그저 무심하게 풍경과 풀꽃과 나무들과 함께 걸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황홀한 순간, 순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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