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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22. 1. 14. 10:24

12

길가온갤러리 기획 <따뜻한 기억의 공간>전 출품에 응한 후 회화작업을 시작했으나 평소 염두에 두지 않던 ‘따뜻함’이 문제였을까? 망해버렸다. 팸플릿 제작을 위한 자료 제출 마감은 다가오고, 고심 끝에 골목을 돌아다니며 찍었던 문과 창의 이미지들을 꺼냈다. 며칠 끙끙거리며 포토샵으로 작업해 시한에 맞춰 자료 파일을 보낼 수 있었다. 출력소에 인화를 맡기면 잽싸게 출력되어 청주로 갈 것이다.

 

[작업 노트]

갈현동 경운동 공덕동 관훈동 광장동 구로동 구산동 구의동 군자동 권농동 길음동 낙원동 남가좌동 내곡동 노고산동 능동 녹번동 답십리동 대조동 대흥동 도선동 동숭동 무악동 미근동 방화동 보문동 북가좌동 불광동 상계동 상암동 서교동 성산동 성수동 송월동 수색동 숭인동 신문로 신사동 신설동 신수동 신촌동 아현동 연남동 연희동 영천동 옥인동 용두동 응암동 이화동 익선동 인사동 입정동 제기동 종로 종암동 중곡동 증산동 창신동 천연동 체부동 충정로 현저동 홍은동 홍제동....... 한 때 골목을 누비던 동네의 목록이다. 오래전 이야기니 재개발에 의해 많은 골목들이 부서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기록했던 골목의 문과 창, 집과 계단, 사람들, 의자와 벽과 식물, 사물들을 꺼내 보다 생각한다. 공간의 따뜻함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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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토론토에서 Tai씨가 네잎 클로버를 보내왔다. 매일 매일 새날이기를, 그 새날마다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축복과 함께. 벌레 먹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레가 벌인 행위예술의 흔적이 선명한 클로버를 보며 그의 건강을 빈다. 고맙고 고마워요. T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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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 귀가한 원이 말했다.

“아침에 바빠서 깜빡 말을 못했네. 꿈에 당신이 나왔어.”

아이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아빠가 걸었어?”

“들어 봐봐. 친구 s 알지? s가 나를 부르더니 창문을 가리키면서 니 남편 좀 보라는 거야. 막 보면 안 보이고 아래 창틀 바로 위에 눈을 맞추고 비스듬히 봐야 보인다면서. 그렇게 비스듬히 봤더니, 무용교습소 같은 곳이었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당신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일어났어. 그러고는 폴짝 폴짝 뛰는 거야. 왜 있잖아? 만화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이 다리 엑스자로 교차하면서 퐁 퐁 뛰는 거. 그렇게 뛰더라고. 왜 그런 꿈을 꾸었나, 생각해봤더니 오늘이 그날인 거야. 당신 다친 날. 6년 됐네.”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랑 나랑 집에 없을 때 아빠 혼자 몰래 걸어 다니다 우리 오면 휠체어에 앉는다더니 그거 진짜 아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쩐지. 낮에 북한산 족두리봉 자락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전시 팸플릿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그 친구의 자태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부럽더라니. 내가 말했다.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그게 좋은 거 아니냐고.

아이 왈

“아니지.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소중한 날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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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민예총이 주최하고 성남민미협이 진행해 온 회원 정기전 형식의 <숯내를 흐르는 숨결>전에 외부 작가로 추천 받아 참여하게 되었다. 올해 주제는 ‘집’. 11월 중순에 홈페이지를 오픈하여 한 달 간 온라인 전시로 치러질 예정이란다.

오래 전에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거칠게 작업한 밑그림이었는데, 캔버스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온라인이라는 전시 형식에 힘입어 수정하고 다듬어 제출 기한에 맞춰 보냈다. 작가노트와 함께. 제목은 <집 속의 집>.

 

[작가 노트]

버스가 목공소 앞에 정차한다.

일과가 끝난 어두운 목공소 안에서 추위에 되살아난 장작불이

토닥 톡 톡 - 불꽃을 튀기고 있다.

양은들통에서 삐져나온 김이 잠시 날다 사라지고

낡은 모자를 쓴 남자, 화투 패로 다 늦은 하루 점을 본다.

톱밥이 그의 한숨에 조금씩 밀려나고

함석지붕이 바람을 맞으며 고양이처럼 운다.

버스는 두 사람을 내려주고 목공소를 떠난다.

다리를 건너고 군부대를 지나고 언덕을 넘어

키 큰 버드나무 앞에 내린다.

골목에 먼저 와있는 노을을 밟고 가 집 앞에 선다.

집은 때로 나를 꿈꾸게 하지만 냉정한 수렁이기도 한 것.

문을 여니 밤으로 여물지 않는 저녁이 다시 굽은 길로

방 안 가득 펼쳐지고

그 끝에 까마득한 집이 서서 바람을 맞고 있다.

집은 때로 늪이지만 길이기도 한 곳.

딸깍 - 불을 켜고 그 길로 걸어 들어간다.

 

20

c형이 전화했다. 어제 용문에서 잤다고. 양평 온 김에 얼굴 보자고. 어서 오시라 했다. 얼마 후 집에 온 그는 느닷없이 동해에 가자고 했다. 딱히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어 그의 차에 올라탔다. 가는 내내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굴곡들을 이야기했다.

봉포항 방파제 끝까지 가 바다를 바라보았고, 아야진항에서 물회를 먹은 후 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울렁거리며 짙은’ 바다의 표면이 차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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