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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7. 3. 11. 17:14
20. 코끼리에 올라 Kenny Drew의 「Recollections」를 골라 재생시키고 눈을 감았다. 손으로 허벅지를 밀어 다리 관절을 움직이며 코끼리를 타기 시작했다. 높고 명징한 피아노를 따라가며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왔는지 가슴에서 왔는지 한 풍경이 뇌에 혹은 마음에 어쩌면 눈 앞에 확 - 펼쳐졌다. 굵고 붉은 몸이 곧게 하늘로 뻗어 굳건히 직립하고 있는 무리들, 삼나무 군락이었다. 선명한 줄기 외에 가지와 잎들, 땅과 바위들와 풀들은 눈에 덮혀 있었다. 순간 울컥해 눈물이 났다. 어디인가? 문득 눈물나게 하는 여기는. 깊이 들여다보았다. 삼나무 군락 사이 까마득한 한 점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집중해 노려보니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고 사람이었고 아이를 업은 원이었다. 아! 여기. 사라오름으로 가던, 이 몸으론 다시 오를 수 없는 그 아름답던 길이로구나. 눈물이 굵어졌다. 혼자였다면 아마 꺽꺽 소리도 냈을 지도 모를 정념이었다. 그때 원이 뒤돌아 나를 불렀다. 그 소리의 울림 때문인지 아니면 눈이 울음에 녹아선지 삼나무 가지에 얹혀있던 눈들이 뚝 뚝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뭉턱 뭉턱 여기저기서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15. 어제 창가로 이사하고, 넓어 편하네 창문이 위로네 달과 눈이 맞으면 기쁘겠네,라며 좋아했는데 오늘 오후에 근로복지공단에서 통보가 왔다. 방 빼란다. 이번 달 말로 입원 치료가 종료되니 집으로 돌아가 통원 치료를 받으란다. 지난 해 시월에 방 빼랄 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곧 겨울인지라 못나가겠다고 버팅겨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고 이의제기 카드 한 번 써먹었고 또한 봄이니 그만 집으로 가기로 했다. 달 말에 돌아가면 일 년하고도 다섯 달 보름만의 귀가다. 원에게 전화해 상황을 이야기하니 봄처럼 어서 오시라며 반겨주었고 같이 있던 아이도 아빠 빨리 와, 소리 지르며 기뻐해주었다.

14. 녹색병원에 오고 아홉 달 동안(세상에! 아홉달이라니 순간 소름이 돋는다) 가운데 자리에 있다 병실 최고참이 되어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공간이 넓고 수납이 용이해 편하고 무엇보다 창문이 있어 좋다. 창문이 작고 높아 앉으나 누우나 하늘만 보이지만 그래도 위안 같은 느낌을 준다. 저 창문을 통해 낮에는 빛이 들어올 테고, 밤에는 어쩌다 귀하게도 달과 눈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쁘겠다.

13. 와유臥遊 - 누워서 유람하다. 집에 누워 산수화를 보며 마음으로 그 산수 속을 돌아다니고 노닐며 즐긴다는 뜻이란다. 그동안 누워 기억의 풍경 속을 걸어다녔던 나의 상상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앞으로도 다양한 길과 산수를 마음으로 걸으며 노닐 생각이니, 그 상상들을 '와유'란 카테고리로 엮어보면 어떨까?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롭고 현실과 초현실을 오고 가고 만유인력 쯤 무시해도 상관 없는 공상의 기록들. 허구일지라도 세밀하고 구체적이다보면 실재가 되지 않을까? 불쑥 불쑥 가슴 저릴 때도 있겠지만 까짓 거. 재미있겠다.

12. 휴게실에 놓여 있는 기립기와 코끼리를 이용할 때 보거나 듣게 되는 티브이에서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반복하여 등장한다. 바로 '통합'이다. '분열을 넘어선 통합' '화해와 통합' '국론의 대통합' 등등. '통합'은 실재하는가? 실현 가능한가? 실재하지도 실현 가능하지도 않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고 조작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통합'은 개인의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억압을 통해 강제적으로 일원화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개념일 것이다. 소위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민주주의라면 '통합'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 '통합'은 그 뒤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의 요설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통합'을 넘어 더 많은 '분열'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11.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묻자 지혜로운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우리 이전에 벌어진 모든 것이며 우리 이전에 일어난 모든 것이고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사람이자 사물이며 역으로 그것에 우리 존재가 영향을 준 것으로, 우리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들이다." - 영화 「나의 가족 나의 도시Almanya-Willkommen in Deutschland」의 마지막 나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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