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33

노트 2017. 3. 21. 13:38
31. 동거차도 앞바다를 출발한 세월호는 목포에 입항하고 근혜씨는 수감되고, 봄비가 오시는 날. 지지난해 가을에 아침 먹고 나선 집으로 올봄과 함께 귀가했다. 몸은 불구이나 삶은 온전하게 여기 있다.

24. 아이와 통화하게 되면 묻곤 한다. 오늘 별 일 없었느냐고. 아이는 마음이 동하면 '별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할 말이 없거나 내키지 않으면 '이렇게 사는 게 별 일이지 뭐'라며 넘어간다. 최근 3일 동안의 별 일.
그제 저녁(원이 아침부터 몸살에 목감기를 앓기 시작한 상황) - "수업 끝나고 공작하는 시간인데 도망쳐서 혼자 집으로 왔어. 엄마 돌봐줄라고. 나 학교에서 혼자 걸어서 온 거 처음인 거 아빠도 알지? 8분 걸렸어."
어제 아침(8시 조금 넘어 아이가 전화) - "아빠 어제 내가 혼자 집에 걸어 온 거 놀랐었지? 근데 오늘도 아침부터 놀랄 일이 있어. 뭐냐면 내가 밥을 했다. 내가 한 밥으로 지금 엄마랑 아침 먹고 있어."
오늘 저녁 - "오늘 미술시간에 아이들이 그림을 좀 작게 그렸는데 선생님이 '너넨 자존심도 없냐? 왜 쥐새끼처럼 그림을 구석탱이에 그리냐!'고 소리를 질렀어. 맨날 소리지르고 야단치고. 말도 드럽게 해. 선생님 잘 때 걸레 물고 자나 봐. 엄마한테 말했어. 나 전학 가고 싶다고."

23.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앚은지 1,072일, 근 3년만이다. 방송사들이 하루 종일 속보로 세월호 인양 소식을 내보내고 있다. 휴게실을 오고 가며 또는 멈추고 앉아 보게 된 세월호의 처참한 몰골과 팽목항에서 바람에 파닥이는 노란 리본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의 울음과 아이들의 오래 전 동영상과 그 외의 수많은 상상에 하루 종일 울컥 울컥 눈물 흘리며 슬퍼했다. 세월호는 왜 침몰했을까? 침몰 직후의 구조 상황은 왜 그렇게 무성의했을까? 박근혜 정부는 왜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을까? 도리어 왜 유가족들을 철저히 무시하며 못살게 굴고, 진상조사위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려 인감힘을 썼을까? 왜 3년이 다 되도록 인양하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게 떠오른 세월호는 답을 줄 수 있을까? 가짜 사실들이 아니라 진짜 사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진실'의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제발 그러하기를, 그리고 미수습자들의 주검이 배 안에 고이 남아있기를 빌고 또 빈다.

21. 점심 먹고 병원 근처 까치공원으로 굴러가 산수유나무 아래 앉는다. 올려다보니 조그맣고 노란 산수유 꽃망울들이 몽글거리고 있다. 문득 옛 일기가 떠올라 블로그를 뒤적여보니, 네 해 전의 삼월 하순이었고 다섯 아이의 봄이었다.
「햇볕이 좋아 아이와 옥천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나선다. 키티 씽씽이를 타고 가던 아이가 묻는다. “진짜 봄이야? 아빠?” “그래. 진짜 봄이 왔네. 온, 봄이 어떤 느낌이야?” 아이가 웃으며 말한다. “좋아. 말랑말랑해.” 운동장 초입에 씽씽이를 주차시키고 공을 찬다. 노란 공을 쫓아 쉼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햇볕도 쉼 없이 말랑말랑 쫓아다닌다. 아이와 그림자가 함께 뛰어다니는 운동장을 보며 문득 생각하기를 ‘빛과 그늘은 진정 한 몸이로구나.’ 아이를 쫓아 나도 뛴다. 헥 헥 -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아, 이 무거운 몸. 숨이 차 잠시 쉬자고 아이를 꼬드겨 놀이터 정자에 앉아 있는데, 아이가 버려진 종이컵을 주워 모래를 담고는 짤막한 나뭇가지 하나 꽂아 들고 와 권한다. “아빠, 마셔. 봄 주스야." 건네받아 "오! 봄 주스." 벌컥벌컥 마시는데 목이 따끔거린다. 봄은 때로 가시 같단 말이지. 아이가 미끄럼을 타는 동안 운동장 가에 줄지어 서 있는 산수유나무를 본다. 작고 노란 꽃망울들이 산형꽃차례로 뭉쳐 마치 하나의 꽃처럼 웅크리고 다닥다닥 가지에 붙어있다. 터지기 직전의 앳된 긴장감이 느껴진다. “온, 긴장하고 다시 뛰어까?” 했더니 “좋아. 그런데 긴장이 뭐야?”라고 묻는다. “긴장? 그런 거 있어. 봄 같은 거.” 답하고는 공을 뻥 - 멀리 차고 아이와 함께 쫓아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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