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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3. 2. 18:56

10  점심을 먹고 아이에게 청했다. “아들, 아빠 산책 좀 하고 싶은데, 같이 껌 사러 갈까?” 2초 동안 망설이던 아이가 좋아!” 외치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경사로를 깔아주어 산책을 나섰다. 날이 흐려 사물들의 그림자가 옅었고 봄꽃은 아직 언감생심 이었다. 골목길을 가다 멈춰서 집을 찍고 있자니 아이가 말했다. “딱 이런 집이네. 아빠 그림에 나오는 집말이야. 오래된 벽에다가 창문이 가운데 하나 있거나 아니면 양 쪽에 하나씩 두 개 있는 거. 그리고 기와로 된 지붕. 딱이네 딱.” 수퍼에 도착하자 파라솔에 앉아있던 할머니들이 휠체어를 밀고 오는 아이를 보며 효자 아들 또 왔다며 반가워해주었다. 아이 손에 만 원을 쥐어주며 마음껏 쓰라고 수퍼로 들여보내고 나는 밖에서 미미한, 그래도 귀한 햇볕을 쬐었다. 얼마 후 아이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뭐 샀게? 자 봐봐? 풍선껌 두 통이랑 엄마 줄 거로 브라보콘 하나, 나 떠블비얀코, 아빠 거로는 바로바로 지평막걸리! 칠천 백 원인데 사장님이 칠천 원만 받았어. 단골이라고. 단골도 아닌데. 한 달에 한 번 올까말깐데. 크크나는 오랜만에 나선 산책이니 마을 한 바퀴를 돌자고 했고, 포장을 뜯어 떠블비얀코를 먹기 시작한 아이는 그러다 엄마 브라보콘이 다 녹는다며 빠른 귀가를 종용했다. 잠시 옥신각신하다 마을 반 바퀴로 타협을 보고 겨울과 봄의 사이 어디쯤을 굴러 집으로 향했다.




07  원과 통화한 후 엄마가 늦어진다고, 둘이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자 아이는 환한 얼굴로 격정적인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이럴 땐 라면이쥐!” 마침 계량컵이 눈에 띄었다. 여태껏 대충 눈짐작과 시간짐작으로 어림하게 끓여 먹었었는데, 아이에게 라면 끓이는 법도 가르칠 겸 정식 레시피 따라 끓여볼까? 라면 봉지 뒷면에 적혀 있는 조리방법을 읽으며 아이에게 계량컵으로 1100ml의 물을 냄비에 부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정밀한 실험을 하는 과학자처럼 눈금에 맞춰 네 번에 걸쳐 냄비에 물을 부었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해 미리 뜯어놓은 면과 스프, 후레이크를 동시에 넣으며 스따또!”라 외치자 아이는 꼭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스톱워치를 작동시켰다. 1분 후 썬 가래떡을 넣고 다시 1분후 계란 두 개를 투하했다. 아이는 이 모든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가스렌지 옆을 지켰다. 라면을 넣은 지 정확히 4분 후에 가스 불을 끄고 그릇에 나누어 담아 먹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먹어보니 생전 처음 조리방법에 따라 끓여 본 라면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레시피라는 게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아무렴. 저 짧은 조리법을 완성하기 위해 연구진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최적의 맛을 찾아냈을 것이다. 문득 조리방법을 설명하는 건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아름다워 한 번 더 읽어보았다. ‘끓는 물 550ml(종이컵 3) 정도에 면과 스프, 후레이크를 넣고 4분간 더 끓여줍니다


05  작은 캔버스에 연꽃을 스케치한 뒤 초벌을 칠하고 물러나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가 다가와 물었다.

아빠 이 꽃 그림 멋있다. 연꽃이지? 이것도 내가 살 게. 얼마야?”

120만원이라고 하자 뭐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번에 파란의자 그림 사고 180만원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사면 되겠네. 아직 다 안 그렸으니까 찜해 놓을 게. 근데 아빠, 나는 지금 저 상태가 딱 좋은 거 같은데. 더 그리는 것보다 말이야.”

작가의 의도가 있으니 더 그려야 한다고 하자 알았다면서 어쨌든 찜해놓을 테니 그렇게 알라며 다시 한 번 구매 의사를 확인시켜주었다. 지난 번 아이가 파란 의자 그림을 산 일화를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받았던 놀라움과 부러움, 칭찬 등의 뜨거운 반응에 고무 받은 모양이었다.


04  등뼈를 매트에 착 붙이고 반듯하게 누워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고 난 뒤 내 몸을 태우면 등뼈를 잡아주고 있던 금속이 하얀 뼈와 함께 남아 있겠구나.


03  원과 온이 상계동으로 들어가 혼자인 밤. 평소처럼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기 힘든 몸을 애써 뒤집으며 잠을 불러보았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일어나 휠체어에 옮겨 타고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계획에도 없던 젯소를 칠하기 시작했다. 한 캔버스 당 칠하고 말리기를 다섯 번씩 반복했다. 젯소가 마르는 틈에는 밑그림을 구상했고 재즈를 찾아 들었고, 끈이론을 비롯해 우주론에 관한 동영상을 뒤적여보았으며 맥주 두 캔을 마셨다. 젯소가 칠해진 캔버스를 한쪽에 가지런하게 세워놓았는데 다 칠하고 세어보니 총 열한 개였고 시간은 어느새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오랜만에 밤을 꼴딱 새웠다. 젯소를 칠하면서 거의 무아지경이었는데 끝 무렵에 딱 한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02  등과 엉덩이를 식히며 누워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두 번 툭 툭 친다. 바쁘디 바쁜 택배아저씨의 액션이 틀림없다. 온이 후다닥 뛰어나가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오고 원이 풀어본다. 길다란 악어집게다. 음식점에서 신발 정리하는 집게 같은 것. 원이 말한다.

엊그제 아들이 잠자리에서 그러는 거야. ‘아빠 한 번 떨어져봐서 그런가 뭐가 떨어지면 아주 개짜증을 내더라.’고 그래서 샀지. 뭔가 떨어져도 짜증내지 마시고 이걸로 평화롭게 집으시라고.”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면 욱! 하고 성질을 부리곤 한다. 떨어진 걸 주우려면 뻑뻑한 허리를 있는 힘껏 굽혀 어렵사리 들어 올려야 하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말대로 떨어지는 물건에 떨어졌던 상처를 이입시키는 걸까? 일어나 악어집게로 시험삼아 이것저것 집는 나를 보며 아이가 웃으며 말한다.

압쥐가 악집을 가지고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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