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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3. 22. 10:17

31 다치기 전보다 다친 후의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말하곤 하는데 정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혹 걷지 못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턱-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오늘 그러했다. 차에서 내려 원과 아이와 함께 집으로 굴러가다 문득, 이 봄을 이제 혼자 거닐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이 짜릿하게 아파왔다.


28  자신 밖에 모르는 아버지와 그런 남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산 엄마 아래서, 온전한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건실하고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형제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밤. 이어서 드는 생각.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 잘 키우려 애쓸 게 아니라 그저 그 존재를 온전히 사랑하면 그만. 그리고 이어지는 부질없는 생각. 부모에게 사랑 받는다는 걸 느끼며 자랐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적어도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지는 않았을 것.


27  누워 눈을 감고 그려본다. 얇고 바삭하게 쌓여 있는 한지에 불을 붙이자 즉시 불탔을 것이다. 숯에서 나와 종이에 스며들었던 수천수만의 글씨들과 수인修仁이라는 이름도, 글씨의 뜻들도, 이제는 지나가 촉감이 없는 이미지로만 남은 시간들도 불꽃을 피우다 찰나에 재가 되었을 것이다. 바람이 조금 불었다면 아마 흩어지며 하늘로 올라갔다 제 생을 소진한 눈처럼 내렸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건 불길과 연기와 재를 바라보고 있을 그의 마음이다. 감히 미루어 짐작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마음을 본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있는 마음을.


24  오늘 처음 뜨개질을 시작한 아이가 뜨갯거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빠, 나 열 코로 열 단 떴다. 처음 치고는 많이 한 거지 뭐. 우리 밖에 나갈까? 미세미세 보니까 오늘 밖에 나가도 된대. , 풍선껌도 사고.” 마다할 이유가 있나. 집을 나섰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게 좋았고 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좋았다. 내리막길에서는 내 무릎에 앉아 같이 굴러 내려갔고, 오르막에서는 밀어주며 편의점에 도착했다. 만원을 들고 들어간 아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오늘은 뭘 샀게? 왔다풍선껌 세 통. 두 통 샀는데 투플러스원이라고 하나 더 주시더라. 그리고 나는 사발면으로 된 불닭볶음면, 엄마가 부탁한 캔맥주, 그리고 아빠 지평막걸리. 아이스크림은 안 샀어. 녹을까 봐.”

평소 멀어서 잘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 돌아가다 엊그제 아내의 물음이 생각나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들,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 같애?” 아이가 대답했다. “마음? 그거 엄마가 어제 물어봐서 대답했어.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마음이 너를 둘러싸고 있다고? 가슴이나 심장처럼 니 몸에 있는 게 아니고? 왜 그렇게 생각했어?” “마음이 몸 속에 있는 거면 마음이 너무 작잖아. 마음은 커야지.”

집집마다 기르는 개들이 우리가 앞을 지나갈 때마다 짖어댔다. 그러다 집 가까이 왔을 때 한 개가 왕 왕 크게 짖으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움찔했는데 다행히 목줄에 걸려 뒤로 물러섰다. 깜짝 놀란 아이가 볼멘소리를 해댔다. “아이 씨, 또 깜짝 놀랐네. , 저 개새끼는 맨날 저래. 진짜.” “개새끼가 뭐냐? 듣는 개 기분 나쁘게.” “그럼 뭐라 그래? 개의 새끼잖아. 개의 자식 말이야. 그러니까 개새끼라고 하는 거야. 그런 의미야.” “마음이 커야 한다며 한 번 짖었다고 그렇게 욕하듯이 말하면 되겠냐?” “한 번이 아니라니까? 맨날 그래. 저 개....... 강아지....... 거 봐 강아지라고 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 답답해. 속이 안 시원해. 고구마 열 개 먹은 거 같애.” 둘은 키득 키득 웃으며 개강아지 개강아지 하다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23  병실에 들어선다. 엄마가 반긴다. 뒷머리카락이 엉겨있고 눈은 부어 있다.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뜬다. 아들 왔어요. 밝게 인사를 하니 아직 아들쯤은 기억한다는 듯 겨우 웃으며 아내와 나를 둘러보다 다시 잠에 빠져든다. 누나가 말한다. 평생 미루어두었던 잠을 한꺼번에 주무시는 것 같아. 덕용 우유 같은 링거액이 똑 똑 떨어져 아버지 혈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저러다 피가 하얀 사람이 될 것만 같다. 누나에게 경과를 듣고 있는데 창문 밖 어두운 산을 배경으로 쏴아 눈이 몰려오더니 금세 세를 불려 와르르 흩어지면서 내리기 시작한다. 눈송이가 점점 커지고 굵어지고 밀도도 높아진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있던 아내가 말한다. 삼월 하순에 이렇게 큰 눈이라니. 눈송이가 달맞이 꽃잎 만해. 모양도 꽃잎 같아. 세상의 모든 꽃들이 지는 것처럼 쏟아지네. 생각한다. 꽃들이 모두 지고 나면 이 세상은 어떤 행성이 될까? 누나도 창으로 가, 이럴 때는 눈이 펑 펑 온다고 해야 하는 거야, 펄 펄 내린다고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핸드폰으로 찰싹 찰싹 눈발을 찍고, 병실 밖에서도 눈을 연호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이 소란에도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색 색 잠을 잔다. 마르고 푸석한 얼굴을 들여다본다. 검버섯이 가득하다. 언제 이렇게 늙었는가. 평생 젊을 거라고 고집불통으로 자신만만해하던 사람이. 또랑또랑하게 자신의 기억만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래서 이렇게 준비도 없이 시들어 침대에 누워있는 건가. 자신의 간에 눈송이 같은 덩어리들이 나고 자라 퍼져 손 쓸 수 없게 된 것도 모른 채. 눈이 잦아들지 않는다. 산 아래 지붕에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눈발을 뚫고 달려온 동생 내외가 도착하자 눈을 뜬 아버지에게 다녀오겠노라고, 마음 편히 쉬시고 계시라고 작별 인사를 한다.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비어있기 때문인가? 의외로 맑고 가벼운 아버지의 눈빛을 보며 불효막심하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은 절멸인가 윤회인가 아니면 그 가운데 길인가. 눈 때문에 갈 길이 걱정이네. 아내의 말에 아버지의 눈을 보며 기도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다. 아버지.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마시고 가볍고 평온하셔요. 꼭 그러하셔요.


22  눈을 뜬다. 어둡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동그랗고 밝은 달이 창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저 보름달 참, 교교皎皎한 것이 교교姣姣해 보이네. 몸통을 좌우로 굴리다 반동으로 일어나 앉는다. 뻑뻑한 등을 펴고 눈을 몇 번 껌뻑인 뒤 방을 둘러본다. 모든 사물이 달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달그림자는 참, 그늘도 부드럽단 말이지. 달을 본다. 부질없이 바라보다 몸을 감싸고 있는 마음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기도한다. 아버지, 아프지 마셔요. 몸도 마음도 고통 없이 편안하셔요. 사라져가는 생에 저항하지 마시고 받아들이셔요. 그래서 평온하셔요.


21  원과 아이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대개 30분가량 수다를 떨다 잠이 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얼핏 아이가 원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일본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웬 일본? 귀를 기울여보았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세종대왕하고 이순신을 좋아한다고 하잖아? 그만큼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위인이 누구냐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야. 일본을 만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오다 노부나가가 옛날 집들을 무너트렸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땅을 다져서 터를 닦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거기에 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대. 근데 세 사람 성격이 전부 달랐나 봐.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 세 사람이 손 안에 새를 들고 있었는데 이 새가 울지 않았대.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오다 노부나가는 다혈질이라서 즉시 죽여 버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가 울도록 만들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렸대. 생각해보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랑 성격이 비슷한 것 같애. 새가 울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죽여? 그리고 왜 억지로 울게 하냐고. 울 때가 되면 지가 알아서 울겠지. 그리고 안 울면 또 어때. 안 울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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