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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4. 4. 21:36

05  계간지「삶이 보이는 창」2019 봄호(통권 118호) 표지와 내지의 갤러리 꼭지인 ‘시선’에 지난 개인전 그림들이 실렸다. 「삶이 보이는 창」은 1998년 1월 창간호를 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노동자 생활문예지로 도서출판 삶창에서 펴내고 있다.

삶창에서 보내준 책을 들춰보고 있자니 옛 생각이 났다.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온 연락. 대학 졸업작품전에 출품했던, 파업 속보를 읽고 있는 두 명의 노동자를 나이프로 거칠게 표현했던 그림. 그 그림을 자신들의 기관지인 「노동자문화통신」 표지에 싣고 싶다는 제안. 그림 슬라이드 필름을 들고 찾아갔던 노문연 사무실. 필름을 전해주고 받은 단체 소개 문건.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읽었던 문건 속의 강령. 강령에 적혀 있던 노동계급의 당파성, 노동자 투쟁,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변혁운동 등의 단어들. 그 불온하고 투쟁적인 단어들을 누가 볼까 두려워 가방에 숨겼던 기억. 1991년이었으니 자그마치 28년 전의 일이다. ㅎ

 

04  귀가한 아들이 가방도 풀지 않고 대뜸 물어보았다.

“아빠, 문제 하나 낼 게. 맞춰 봐? 인생 이야긴데.......”

“인생?”

“어, 인생. 인생은 비와 디 사이의 씨다. 비와 디와 씨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를 맞추는 거야. 근데 아빠 혹시 또 이런 식으로 하지 마라. 비 오는 날 씨앗을 심다가 디지게 비 맞는 거, 뭐 이런 거 하지 마라. 분명 알파벳 비 씨 디다!”

“크 크.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시고....... 인생이 비와 디 사이의 씨라고? 흠....... 비....... 브라질에서 태어나, 씨....... 콜롬비아에서 살다가, 디....... 디트로이트에서 죽는 거?”

“참 나.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좀 성의 있게 해 봐, 아빠. 나한텐 맨날 성의 없이 글씨 쓴다고 뭐라 하면서.”

“크 크. 비 씨 디라....... 비....... 본 태어나서, 씨....... 크리에이트 창조하고, 디....... 데드 죽는다. 올~ 막 찍었는데 그럴듯하지 않아? 혹시....... 이거?”

“쫌 비슷했지만 땡!”

“비와 디 사이의 씨라....... 아몰랑. 그냥 가르쳐줘.”

“알았어. 자 봐. 비랑 디는 아빠가 말한 거랑 아주 비슷해. 본이 아니라 버쓰고 데드가 아니라 데쓰야. 근데 씨는 틀렸어. 씨는 뭐냐면 초이쓰.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맨날 맨날 선택을 하면서 사는데, 자기가 선택하는 거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대. 엄마 말로는 우주가 바뀐다나? 이제 알았지?”

“와우! 이런 심오한 걸 어떻게 안 거야?”

“아까 내가 핫바랑 핫도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 엄마가 얘기해준 거야. 인생은 참, 어려워. 그지? 간식인데 둘 다 먹을 수도 없고.”

“흠, 버쓰와 데쓰 사이의 초이쓰라....... 말 되네. 말 돼.”

가방과 웃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간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돌이켜 보았다. 중요한 순간의 내 선택들을. 그 A와 B를. 그리곤 생각했다. 지금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도 내가 선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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