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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5. 21. 10:38

30  피해자는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고 가해자는 그 죄질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렇지 않다. 피해자의 삶은 피폐해지고 복구가 쉽지 않은 반면 가해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피해자가 여성이고 가해자가 남성일 경우 더욱 그렇다.

 

28  어떤 정치적 입장인지와 상관없이 맨스플레인을 시전하는 한남아재라면 진보라 말할 수 없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반동이므로.

 

27  [터미네이터] 1편을 보며 그 매력에 반해 흠뻑 빠졌었던 사라 코너_린다 해밀턴이 [터미네이터_다크 페이트]로 ‘I’ll be back’ 하신단다. 보고 싶다.

 

26  이응 선배가 지리산 종주 중이라며 페북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삼도봉이었다. 진심 부러워 「부럽 부럽^^」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20대 중반에 3년 연거푸 지리산을 종주했었다. 첫해는 가을에, 이듬해는 여름에, 그 다음 해에는 봄에. 풍요가 지나간 뒤 차분히 가라앉은 갈색의 가을이 가장 좋았다. 봄과는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교감하기 시작했으므로 그 맛을 몰랐고, 여름 종주 때는 내내 비와 씨름했었다. 늘 동경하면서도 그 후로 다시 지리산에 오르지 못했다. 아내의 ‘결혼 후 꼭 해야 할 것’ 목록 중에 늘 상위에 올라있던 것도 지리산 종주였는데 단 한 번도 함께 가지 못했다. 다치고 나서야 비겁하게도 그 사실이 애통했다. 지리산 운운한 김에 아주 오오랜만에 「시」 폴더에 들어가 처음 올랐던 지리산에서 돌아와 쓴 글을 찾아본다. 좀 오그라들지만 뭐, 20대였으니. 

 

처음, 지리산

 

길 밖의 길을 걸으며 계곡을 살핀다
배낭 속엔 감자 몇 개와 칼, 소총 반 자루
큰 바위 아래 숨어 무전기를 튼다
- 안 녕 이 라 고 말 하 지 마 -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무전기를 품는다
철의 온도가 매정하다

 

지름길을 배운 적 없어
길 밖의 길을 꼭 꼭 밟으며 가느라
느리고 숨이 차다
일행이 신음 소리를 낸다
그의 무릎을 동여맨 손수건이 피처럼 붉다
조심해 붉은 색은 암호라니까
그를 업는데 체온이 속절없이 따뜻해 웃는다
계곡도 속절없이 깊어진다

 

봉우리 그늘에 지치고 닳은 몸을 널어 놓는다
감자에는 새싹이 돋아 독이 오르고
소총을 분해해도 먹을 수는 없어 그리고
저기 봐 저 산 너머 산 너머 산을 봐
서리가 앉았어 겨울이 오고 있나봐
얇은 등가죽 뒤로 활 활 노을이 진다

 

그래도 접선의 신호가 올 때까지 까지
멈출 수 없어 다시 걷는다
툭 – 소리에 놀라 소총을 꺼내 경계를 한다
움켜쥐어도 반은 동강난 몸
바람인가 살쾡이인가 아니면 나인가

 

손전등도 없이 축적도도 없이
가야 하는 이 길은 어디에 가 닿을까
하지만 누가 세상의 모든 길을
다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아직 걷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옛날 해골 위를 대에 대를 이어 날아다니는
나비, 그 날개를 비추는 노을이
아직 남아서 반짝거린다고
눈물이 조금 비칠 뿐이다

 

25  “제 자리에서 글을 쓰는 일로 다시 부서진 것들을 고치고, 떠내려가는 것들을 건져내고, 닫힌 문은 열고, 사라지는 것들을 애도하고, 메마른 것들에게 물을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저의 소박한 꿈이며 계획입니다.”

표절논란 후 4년 만에 신작을 발표하며 복귀한, 표절에 대해서는 애매한 자세만을 취하는 신경숙씨가 한 말이란다. 자신의 글로 저런 일들을 하겠다고 당당히 밝히는 것이 민망스럽고 그래서 미심쩍은데, 저 거창하고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을 ‘소박한 꿈’이라 말하다니. 그의 진심이 아니라 만지고 고치고 다듬어 만들어 낸, 그럴싸하지만 죽은 문장인 것만 같아 씁쓸하다.

 

24  아이가 약지만 접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펼친 채 물어보았다.

온 – 아빠 이게 무슨 뜻이게?

나 – 그거? 사랑? 아니면 칭찬하는 거?

온 – 아니. 힌트를 주자면 이건 요즘 유행하는 욕이야.

나 – 욕이라고? 그럼 모르겠는데? 아빠는 그런 욕을 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니.

아이는 잘 보아야 한다면서 폈던 손가락을 접은 뒤 다시 하나씩 펴면서 말했다.

온 - (집게손가락을 펴며) 이건 ‘너 같은’이야. 누구를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이잖아. 그 다음에 (새끼손가락을 펴며) 새끼손가락이니까 ‘새끼는’ 이고. (중지를 펴며) 이건 알지? 욕할 때 쓰는 거.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펴며) 이건 ‘최고야’란 뜻이야. 자! 알겠지? 자 그럼 합쳐서 말해 볼 게.

아이는 집게손가락, 새끼손가락, 중지, 엄지손가락 순으로 펼치며 말했다.

온 – 너 같은, 새끼는, 뻑큐가, 최고야!

나 – 하 하 하, 재밌네. 창의적인 욕이로구만.

내가 껄껄 웃으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아이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욕을 장착한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이는 가끔 친구들이 하는 욕을 가르쳐준다면서 나를 보며 찰지게 욕을 하곤 한다. 설마, 내게 하는 건 아니겠지?

 

23  노동자를 중심으로 민중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고집스럽게 천착하는 박모 작가가 대형 이젤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큼지막한 박스를 낑낑거리며 집안으로 들인 아내가 박스를 열어 조립해야 할 부품들을 꺼내 거실 한 켠에 쌓아놓고는, 기둘려요. 이따 집에 돌아와 아이랑 후딱 조립해줄라니까,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허리를 굽혀 길고 굵은 나무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조립하는 상상을 하다 접고 하다 접은 끝에, 아자! 기합 한 번 넣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 부분의 나무들이 크고 단단하고 무거워 쉽지 않았다. 가능한 자세를 찾고 취하느라 진행이 더뎠고, 렌치로 나사 하나 조이는데도 제법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버거울 때마다 끙 끙 신음소리를 냈다. 한 번 손가락이 끼었고, 한 번은 나무가 무릎에 떨어졌다. 손은 엄청 아팠고 무릎은 넘의 살 같으니 아픈 줄 몰랐다. 조악한 설명서를 보며 쉬엄쉬엄 어찌어찌 맞추고 나니 대략 세 시간이 흘렀고 저녁이 되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지병인 허무가 도져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라 몸과 마음의 리듬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그림과 데면데면 지냈는데, 완성되어 떡하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이젤을 보고 있자니 다시 그림에 박차를 가하라는 격려 같았다. 선물 고마워요, 형! 잘 쓸 게요. 뒷면 어딘가에 형 이름도 새겨 넣을 게.

 

22  얼마 전, 고등학교 때 화실을 함께 다녔던 선배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내 기사를 보고 나를 소개했다. ‘말 수가 적고 가끔씩 하얀 이 한가득 씨익 웃는 친구였다’고. 그리고 엊그제 페북에 댓글을 단 고등학교 때 친구가 이렇게 인사했다. ‘항상 웃는 모습의 야일아 반갑다’고. 내가 말 없고 웃음이 많았던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그 과묵과 웃음은 아마도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장막이었을 것이다.

 

21  잠자리에 든 아이와 아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아내가 말했다.
원 _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게 즐겁지 않을까?
온 _ 엄마, 삶은 원래 고해야. 근데 나는 사는 게 좋아. 즐거워.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나 _ 아들, 삶이 고해라면서 너는 사는 게 즐겁다고?
온 _ 어. 삶은 그 자체로는 고해인데 나는 살아 있는 게 좋다고. 재미있다고.
나 _ 그게 말이 되나? 삶이라는 게 원래 고통이라면 너도 삶을 살고 있으니까 너도 고통스러워야 되는 거 아닌가?
온 _ 왜 말이 안 돼? 삶이라는 것 자체랑 내가 살아가는 거랑은 다른 거야. 그래서 삶은 고해여도 나는 즐겁게 살 수 있는 거라고.
원 _ 삶이 고통이라는 걸 알았으니 삶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나 _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온 _ 엄마랑 어제 차 타고 집에 오면서 인생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느꼈어.
나 _ 그럼 왜 삶이 고해인데? 어떻게 고통스러운 건데?
온 _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고 다 늙고 병들고 죽으니까. 그게 괴로운 거지.
나 _ 허, 참. 나는 이제 삶이 고라는 걸 알기 시작했구마는.......

공부에는 1도 관심 없어 구구단도 버벅거리고, 뒹굴거리는 게 취미인 녀석이, 노력이나 성실 같은 건전한 덕목과는 거리가 멀고 오로지 ‘당장의 재미’에 목숨 거는 녀석이, 늘 어떻게 하면 엄마를 꼬드겨 핸드폰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는데 애를 쓰는 녀석이, 핸드폰이라면 존심 같은 거 접고 스스럼없이 알랑방귀도 뀌는 녀석이 간혹 이런 소리를 한다. 금세 잊고 천상 개구쟁이 모드로 복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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