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

노트 2019. 5. 12. 21:50

18  한 시간을 달려 원소리에 도착했다. 오후 다섯 시였다. 먼저 와 산딸나무 아래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형제들이 반겨주었다. 술상 주변으로 할미꽃이 머리를 하얗게 풀어헤친 채 무리를 지어 피어 있었고 중간 중간 개양귀비가 빨간 점처럼 나른하게 서 있었다. 수레국화도 보라색을 더하며 어울려 살고 있었다. 안주는 단출하게 돼지고기와 상추, 고추와 마늘 그리고 김치였다. 양평에서 사가지고 간 주꾸미볶음을 더했다. 산딸나무 꽃들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앙증맞은 꽃들이 크고 하얘지면 나무에 눈이 가득 쌓인 것처럼 환하지. 그 하얀 나무 아래에서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곤 했었지. 늦게 오는 원소리의 봄은 내 마음의 동요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아름다웠지. 앞산과 뒷산에서 새들이 울었다. 나는 소쩍인가 했고 누이는 뻐꾸기라고 했고 동생은 후투티라 했다. 아내는 장난삼아 누구새라며 웃었는데 누나가 검은등뻐꾸기라고 정리해주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새의 이름은 물론 그 새가 올 봄 원소리에서 처음 운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셨을 것이다. 동생이 선곡하는 음악을 들으며 사십구재, 전생과 윤회, 무아와 무상, 영혼, 에너지, 아버지, 엄마의 새로운 거처, bts, roda vida, 아이들, 이사, 운곡재의 사용법 등등 수다들 떨며 웃고 우는데 흐렸던 하늘이 열려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햇빛은 먼 숲에서는 바람과 함께 빛났고, 가까운 나뭇잎들을 투과해 잎을 반투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내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늘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시던 노을의 시간. 오늘도 보고 계시려나? 형제들 모두 해가 산 넘어 사라지고 노을이 어두워질 때까지 말없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16  눈을 뜬다. 4시 04분. 창문 왼쪽 위 구석에 샛별이 빛나고 있다. 별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평안하시지요?

 

15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나를 불렀다. 가보니 바탕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탕화면 바꿨어. 이거 좋네. 괜찮지? 아빠 서 있는 거. 근데 낯설다. 되게 낯설다. 아빠 서 있는 거. 아, 좀 서 봐라. 진짜.”

사진은 2010년 겨울, 두 살 아이를 업고 눈 덮인 한라산 사라오름을 오르던 날의 컷들 중 하나였다. 서서 웃는 모습이라니. 나도 낯설었다.

 

12  이천의 작은 절. 어슬렁거리며 엄마의 핸드폰을 호시탐탐 노리던 아이는 느닷없이 뽑기 코너에서 호객 및 진행을 맡게 되어, 아이들에게 뽑기 방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무료체험 부스의 그늘로 들어간 아내는 지인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비빔밥과 배춧국으로 점심 공양을 한 자리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실시간 법문에 귀기울여보지만 주변이 시끄러워 듣기 어렵다. 귀를 닫고 숲을 바라본다. 잡다한 생각들이 오고 간다.
* 바람에 움직이는 저 숲_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경외.
* 사방의 변에 자리 잡은 법당과 공양간과 행사 천막들_ 그 가운데에 떡하니 비어 있는 마당_비어 있어 지나다닐 수 있는 것_비어 있다는 건 고정된 것 없는,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
* 스텝 티셔츠 뒷면에 쓰여진 문구[너와 나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_너에게 따뜻한 적 없었고 나에게 친절한 적 없었다_내가 너를 대하는 방식은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나.
* 정체성이라는 허구.
* ‘나’라는 설정 자체가 오류_‘나’일 것이 없으니 태어나고 죽을 것도, 더럽고 깨끗할 것도, 늘어나거나 줄어들 것도 없는 것이려나.
* 꼭 이래야 할 것도, 꼭 그러지 말아야 할 것도 없고_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
* 이제야 이 나이에 생각하기 시작한다_고苦에 대해서.
* 아버지_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 네 생각에 대한 못마땅함은 너와 상관없는 나의 생각일 뿐.
* 죽음은 그저 절멸일까.
아빠, 손님이 없어서 심심해. 아빠도 이리 와서 한 판 해 봐. 아이가 소리쳐 부른다. 날이 날인지라, 장소가 장소인지라 생각이 꼬리 꼬리 멜랑꼬리했구만. 빈 마당을 가로질러 뽑기 코너로 굴러간다. 그림자가 우둘투둘 앞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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