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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22. 1. 14. 09:41

21

8시 반에 예약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제법 비가 내렸다. 차를 타고 읍내로 가는데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비를 뚫고 가서 보는 내리는 바다. 혼잣말을 했다.

“바다 가고 싶다, 썅!”

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내가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며 말했다.

“바다에 비하면 껌이지만 우리가 또 남한강가에 살고 있잖소. 내 당장 바다는 못가도 강은 보여드리리다.”

필로티 주차장이 있어 비를 맞지 않고 차에 오르내릴 수 있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투썸 3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저녁부터 금식했던 터라 할라피뇨 바게트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길 건너 강이 고요히 흐르고, 강 건너 산 능선에서는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는데 느자구없이 눈시울이 붉어져 짐짓 코 한 번 훌쩍였다. 그러고 깊이 숨을 쉬는데 엊그제 들은 법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숨을 쉬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26

잠자리에 누워 엄마와 수다를 떨던 아이가 외가와 친가 어른들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원이 답해주는 와중에 외할머니는 지금도 일을 하신다고 하자 아이가 놀라며 말했다.

"할머니가 지금도 일한다고? 열정적이시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닮아 열정적인 거였군."

" 내가? 열정적이라고?"

" 열정적이잖아. 몰랐어?"

"그래? 한 번도 내가 열정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천성이 미지근해서 참 열정 없는 삶이다, 뭐 이렇게 생각해왔는데. 열정 있는 사람들이 어쩌다 부럽기도 하고."

" 엄마 열심히 살잖아. 성실한 게 열정적인 거야."

그 말에 감동한 원이 나를 부르며 말했다.

" 여보, 우리 아들 생이지지 아냐?"

내가 답했다.

" 생이지지는 무슨. 게임 때문에 머리 지진나게 하는 놈이 무슨."

그러자 아이 왈

"오! 우리 아빠, 라임 좀 보소. 생이쥐쥐 머리쥐쥔."

 

30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가 말했다.

"어제 내가 오랜만에 혼자 잤잖아. 잠이 잘 안 와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했거든? 근데 내 몸이 되게 되게 크게 느껴지는 거야. 그리고 내 몸에 뇌 말고 다른 존재가 있는 것 같더라고. 몸이 뇌의 명령이 아니라 그 다른 존재 때문에 움직이는 거 같았어. 영혼 같은 거 뭐 그런 건가? 근데 그러니까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어."

그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이 얘기 아빠 페이스북에 올려. 크."

아이의 이야기를 페북에 올릴 때마다 허락을 얻고 때론 감수를 받기도 하는데, 오늘처럼 먼저 올리라고 하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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