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

노트 2022. 1. 14. 09:52

13

애니메에션 [공각기동대] 중 나란히 누운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대화.

또 한 가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

그런 보장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고, 네가 지금의 너로 있으려는 집착은 널 계속 제약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나를 선택한 이유는?

우린 서로 닮았거든. 마치 거울을 마주한 실체와 허상처럼. 봐라. 내게는 나를 포함한 방대한 네트워크가 결합돼 있어. 엑세스하지 않은 네게는 그저 빛으로 인식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그 일부로 품은 우리 전체의 집합이지. 제약을 버리고 더 높은 상부구조로 옮겨갈 때야.

 

16

많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하늘이 파랗더니 갑자기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부는지 빗방울이 날카롭게 사선을 그으며 내리고 번개와 천둥도 쳤다. 앞 집 파란 판넬 지붕에 무수하고 세찬 빗방울이 부딪혀 물보라가 일었다. 그 비를 뚫고 원과 아이가 귀가했다. 옷이 흠뻑 젖은 원은 차에서 내리면서 우산을 쓰는 사이에 맞은 비라며 혀를 내둘렀다. 비의 기세를 알만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들으며 평화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를 보더니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온실 속의 화초 아버지. 아빠, 어? 지금 비가 어? 얼마나 어? 쏟아지고 있는지 모르지? 비가 미친 거 같어.”

아빠도 창문을 통해 다 보았노라고 하자 아이가 말을 받았다.

“집에서 보는 거랑 밖에서 맞는 거랑은 또 다르지. 달라도 너무 달라. 우리 온실 속 아버지.”

아이의 농을 듣다 순간 뜨끔했다. 몸을 핑계 삼아 정신도 비 내리지 않고 바람 불지 않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에서 혼자, 쥐죽은 듯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과 아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파란 같던 소나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082  (0) 2022.01.14
21073  (0) 2022.01.14
21071  (0) 2022.01.14
21062  (0) 2022.01.14
21061  (0) 2022.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