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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22. 1. 14. 09:50

01

홍천에서 일을 보고 귀가한 원이 장바구니에서 홍천 팔봉산막걸리를 떡하니 꺼냈다. 원소리에서 아버지와 20년 동안 마신 술.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보았다. 오로지 막걸리만 드신 아버지는 이 1.7리터 용량의 팔봉산막걸리를 하루 한 통은 기본이었고 가족모임이나 행사, 손님이 있을 때마다 플러스 알파에 또 플러스였으니 대략 9,000통은 드셨을 것이다. 냉장고에 잘 모셔두었다가 저녁과 함께 했다. 돌돌돌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처음이었다. 아이가 잔에 남아 있던 막걸리를 냉큼 마시곤 말했다.

“크! 이 맛이네. 할아버지 막걸리 맛.”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말했었다. 이젠 할아버지한테 팔봉산막걸리 한 잔 얻어 마실 수 없게 되어 서운하다고.

 

02

[작가노트]

수년 전의 일이다. 지방 출장을 다녀온 아내가 문간에 가방을 턱 내려놓고는 방에 들어가 쓰러져 잠들었다. 아내와 같은 자세로 퍼져 있는 가방이, 희망 따윈 개나 주고 어둠을 잔뜩 품고 있을 것만 같은 그 검은 가방이 마음 아팠다. 잠시 쉬었다 내일이면 다시 짐을 담고 집을 나서야 하는 고단한 생애. 그때 처음으로 가방을 그렸고 이런 메모를 남겼다.

[어제 강원도에서 돌아온 이응의 저 가방. 곧 다시 어디론가 떠날 저 가방. 저 속에 어둠이 들었다고 들었다. 가방에서 한 움큼 두 움큼, 어둠을 꺼내면 그때마다 펑 - 퐁 -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들었다. 그렇게 꺼내고 또 꺼내도, 사라지고 또 사라져도 희한하게 가방에는 늘 똑같은 양의 어둠이 산다고 들었다. 언젠가 이응이 한숨을 폭 - 쉬며 말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어둠이라니! 멋지지 않아?]

그 후로 간혹 지병인 허무가 도져 작업에 손을 놓고 있을 때, 가방을 그리며 다시 시동을 걸곤 한다. 떠나고 돌아오고 떠나고 돌아오는, 결국은 떠나야만 하는 가방. 허무라 해도 내가 짊어져야만 하는 내 몫의 짐. 아내의 말을 생각하며 그린다.

“고고! 인생은 고苦이며 고go인 것. 울든 웃든 나아가야 하는 것.”

 

05

1년 반 만에 골밀도 검사를 받았다. 두 다리가 딱히 중력에 힘입어 살지 않았고, 햇빛과 멀리 지냈으니 나아졌으리라는 기대는 언감생심. 그래도 내심 현상유지를 바랐으나 전보다 더 나빠졌다. 컬러풀한 검사 결과 그래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의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골다공증 치료제와 칼슘보충제를 처방해주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늘어났다. ‘복약 지도서’에 적힌 약의 부작용들은 왜 그리 심각하고 자못 비정한지.

안쪽으로 접히는 강직 때문에 왼쪽 다리는 짧아지지요, 고관절에 슝 슝 바람이 들어 뼈는 삭지요, 이러다가는 신경이 돌아와도 걷기 쉽지 않겠다며 킥 킥 웃었다.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다 쓸모가 있는 다리이니 부러지거나 부서지게 놔두지는 말아야지. 대충주의자 인생에 처음으로 ‘경각심’이란 단어를 다 떠올랐다.

 

06

미장원을 나선다. 자른 머리카락 그깟 무게가 뭐라고 몸이 가볍다. 날이 흐리고 덥고 습하나 비 소식은 없어 산책을 하며 돌아가기로 한다. 큰길 가장자리에 붙어 가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지나 뒷길로 접어든다.

모는 부쩍 자라 촘촘히 푸르고, 빌라보다 높은 은행나무에 초록 열매가 점 점 점 모여 무수히 달려있다. 그 모양이 비장해 보인다. 3억 년 전부터 이어오고 있기 때문일까? 종종 은행나무에서 알다가도 모를 기괴함을 느끼곤 한다.

담을 뒤덮은 넓은 호박덩굴 옆으로 원추리가 무리지어 서 있다. ‘원추리 꽃밭에 실잠자리 저녁 바람에 하늘거리고.......’ 정태춘 선생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곤 [실향가]의 한 소절이 연이어 떠오른다. ‘바깥 사랑채엔 늙으신 어마니 어린 조카들 가난한 형수님.......’ 어릴 적 이 대목을 들을 때마다 난 왜 울었던가. 엄마는 늙지 않았고 형수님도 없었건만. ‘가난’이란 단어 때문이었을까?

폐쇄된 마을회관 옆 공터에 덤프트럭이 드나들며 흙을 붓고 있다. 다져 땅을 만들고 반듯하게 구획해 터를 잡은 뒤 건물을 올려놓을 것이다. 마을 뒤쪽으로 차도가 새로 나면서 근처의 밭과 논, 공터들이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대지로 속속 변하고 있다.

곳곳에서 개망초는 무리지어 환하고 낡은 집 벽에 담쟁이가 번성하고 있다. 하얗고 붉은 접시꽃도 도처에 서 있다. 로제트 상태로 땅에 붙어 겨울을 난다는데 이렇게 높이 자라다니. 접시꽃의 겨울 잎과 여름 줄기 끝과의 간극이 커 신기하다.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길가 풀밭의 파란 달개비가 반갑다. 나비 같은 달개비를 보며 뿌리와 날개에 대해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무엇이 나와 더 친한지. 결론은 땅을 딛고 걷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굴러다니면 된다.

폐가 벽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천막이 쳐져 있고 그 안에 고양이 먹이와 그릇이 체계적으로 놓여 있다. 참 깔끔한 캣맘이시다. 폐가를 뒤덮은 환삼덩굴에게 한 때 미워했음을 사과하는데 1톤 트럭이 좁은 이면도로를 슝 - 지나쳐 가 깜짝 놀란다.

목화빌라를 끼고 꺾어 조금 전진하다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선다. 40분가량 걸렸다. 미미하나 집까지 꾸준히 오르막이라 땀이 난다. 땀에 전 등이 축축하니 상쾌하다.

 

07

저녁을 먹으며 원이 말했다.

“집에 오면서 온이한테 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러더군. ‘당연히 사랑하지.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지. 이렇게 사랑 받고 사는데 나를 안 사랑할 수가 없지.’ 그러고는 말끝에 뭐라 중얼거려. 뭐라 그러는 거냐고 물으니까 몰라도 된다며 가르쳐주지는 않고. 아들, 아까 뭐라 그런 거야? 나르시시즘? 뭐 그런 거 같았는데, 맞아?”

그런 게 있으니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고 대답을 회피하던 아이는 엄마가 궁금하다며 재차 묻자 슬며시 입을 열었다.

“맞아. 나르시시즘.”

그러고는 단호한 어투로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다.”

내가 끼어들었다.

“크 크. 어쨌든 자신을 사랑한다니 아주 좋구만. 아빠가 그걸 못해서 힘들게 살았어. 어렸을 땐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 척박했고, 커서는 자신만 사랑해서 또 황무지 같았고. 그랬네.”

아이는 뭔 소리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배추된장국에 말은 밥을 입에 넣고 씹으며 젓가락으로 오이김치를 집어 들었다.

 

10

어젯밤 구토를 하고 몸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던 아내가 서종의 한의원에 다녀왔다. 각종 첨단 진단 기계가 갖춰진 크고 유명한 곳이라 했다. 2시간 넘게 진료를 받고 한 달간의 약을 맞춰 온 아내가 말했다. 기와 맥이 다 소진된, 그야말로 기진맥진에 뼈가 무너지고 주저앉고 휘어져 골병이 들었다고. 타고난 몸 자체는 지극이 정상적이고 정확해 아플 몸이 아닌데, 몸 상태가 70에 가깝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의사가 물었단다. 아내는 내 사고와 장애와 입원, 아이를 보살피며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병원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다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단다. 손 댈 수 없는 지경은 아니고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고. 아내는 이대로 죽을 수 없으니 자신을 제대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에너지 넘치는 의사는 그래보자며 주먹을 불끈 쥐었단다. 다행이다. 몸을 바로잡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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