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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11. 1. 13:04

친구가 우주와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 만 개의 은하계와 45억년의 풍상을 겪은 지구에 대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배를 곯는 한 마리의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떠올리고 지금 필요한 500만원을 상상한다.(10)

훗날의 정주定住를 디자인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당장의 방랑을 꿈꾸었다.(07)

잦은 비 때문에 옥수수와 고추 농사는 영 재미를 못 봤지만 가을볕과 어머니 아버지의 수고 덕분에 배추는 싱싱하고 크고 알차다. 무는 또 어찌나 튼실하신지. 어머니는 배추가 너무 잘 되어 주체할 수 없다며 투덜거리신다. 내년에는 절반만 심을란다, 하시지만 아마도 또 올 해 만큼 심으시겠지. 이백 포기를 포기마다 넷으로 갈라 김장을 한다. 절인 배추를 맨손으로 씻어도 될 만한 따뜻한 날씨에 어머니와 아버지, 어제 내려온 동생이 배추와 무를 뽑고 다듬어 절여 놓아, 그들의 수고가 내 수고를 덜어주어 수월하다.(05)

가방을 매고 작업실을 나서려는데 친구가 묻는다. "양평 내려와 사니 좋으신가?"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답한다. "추수한 논에 한적한 노을, 뚝뚝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 거칠 것 없는 산, 가까이서 피고 지는 꽃들, 맑은 공기....... 서울에 비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정작 나는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이니 감흥을 느낄 여유가 없이 떠다니는 것 같네. 정착의 흐뭇함을 즐길 수 없는 것이 여기도 내 생의 경유지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네........ 어쩌면 내 업인 것일까?"(02)

보일 듯 말 듯한 바람에 푸른 하늘, 갖은 농담으로 물든 벚잎이 툭 툭 떨어지는 걸 본다. 저게 벚나무의 말일까? 말이라는 게 부질없어 차라리 두려운 요즘,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앉아 있던 새 한 마리 떠나는 찰나, 투 두 둑 세 잎이 떨어진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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