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2

노트 2012. 1. 21. 04:42

태홍과 이야기를 나누다 혹시 그녀 마음에 흠집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해 오래도록 감추어 두었던 진심을 말하고 만다.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삶은 생산하지 않는 것,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유를 빌어 생산하고 드러내는 것을 멈추고 그 생산물로 환전하지 않는 삶. 덧붙인다. 죽기 전에 한 번 해볼 수나 있으려나? 태홍이 웃으며 말한다. 이해해요. 당신과 나는 대화가 되고 마음은 잘 통하는데, 어쩌면 그래서인가? 일상이 궁핍하단 말이지.(19)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료 값과 소 값 하락으로 인한 영세 축산농가들의 시름을 다루는 방송을 본다. 한미FTA, 생산자와 소비자가 소외되는 유통구조, 대책 없음이 자랑스러운 정부. 개혁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농가의 하소연보다 먼저 소들을 본다. 30개월 이상 살면 육고기의 가치가 떨어져 죽어줘야 하는 수소들. 효율적이지 못해 굶어죽는 그들. 생명이 아니라 음식인 그들. 남의 살, 그만 먹어야겠다.(18)

친구가 말한다. 호모하빌리스로부터 그 후 백만 년 동안 타제석기를 썼다는구만. 백만 년 동안 진화와 발전이 멈추었다는 거지. 선사의 정체기였던 거야. 그의 말을 들으며 떠올린다. 그 백만 년 동안 나고 죽은 이루 셀 수 없는 영장류들. 소위 정체기에 단 하루도 쉬지 않으며 살아가고 살아남기 위해 자연과 싸웠던 각각의 개개인들을. 정체기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16)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신다. 보수를 지향하는, 좌파를 과격하고 급진적이고 안하무인이며 편협한 무리들이라 생각하시는 아버지께서 물으신다. 좌파의 가치가 무엇인가? 나는 답한다. 수평과 평등일 것입니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동물, 곤충들과 나 사이에도 위 아래 없이 같은 무게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뭐, 아버지께서는 저를 어찌 보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좌파가 아닙니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니까요. 사실 아나키즘에 더한 매력을 느낍니다. 하지만 또한 아나키스트도 아닙니다. 그 가치를 제 일상에 전혀 접목시키지 않으니까요.

술자리를 파하고 열이 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마당으로 나선다. 별들이 선명하다. 생각한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취醉하고, 친구는 책 속의 별을 보며 얻는구나. 나는 반짝이는 별을 보며 결국 슬퍼하고 그는 정연한 활자를 보며 앎에 기뻐하는구나.(14)

이촌에서 양평으로 가는 전철에서 잠이 들고 꿈을 꾼다. 몽유도원도 같은 풍경을 등지고 다가온, 적어도 천 년 쯤은 산 듯한 아이가 말한다. 네가 세상에 왔을 때 내가 물었었지. 견딜 수 있겠느냐고. 너는 아응 아응 - 울음으로 그걸 어찌 알겠느냐고 답했었지. 후로 드문드문 너를 찾아가 물었지. 견딜 수 있겠느냐고. 너는 여러 몸짓과 언어로, 때로는 잠으로 때로는 취하여 답했지. 그걸 어찌 알겠느냐고. 이제 다시 네게 묻는다. 견딜 수 있겠니? 나는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황홀해. 견디는 게. 아이는 허 허 - 웃는 와중에 백발노인이 되었고 세한도의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깨어보니 중앙선은 양정역을 지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본다. 듬성듬성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아이가, 노인이 있을 것만 같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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