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3

노트 2012. 1. 31. 13:03

지난 해 찍은 온의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기 위해 정리하고 편집한다. 제법 자랐고, 건강히 자랐다. 고맙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 했던 그 초심을 잊지 않기를.(31)

꿈 이야기. 맑고 차가운 소리를 내는 산악용 모토바이크로 눈 쌓인 산을 오른다. 거침이 없다. 정상에 오르자 어느새 밤이 되었다. 마치 하늘을 뒤덮은 양떼구름처럼 어마어마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고, 산에 쌓인 눈도 그만큼 빛난다. 압도되어 혼미한 상태로 풍경을 보다 바이크를 몰고 하산한다. 훌쩍 산을 내려오니 한적하고 작은 마을이 있는 바닷가다. 색이 짙푸르다. 배가 한 척 떠있는데 물건이 가득하고 사람들도 북적인다. 뱃머리에 흰 옷을 입은 처녀가 서 있다. 배는 천천히 출발하고 나는 소리친다. 공양미 삼백석, 심청이다!(29)

하룻밤 함께 묵었던 사람들과 헤어지고 태홍이 묻는다. 도편수씨 어떤 것 같아요? 답한다. 글쎄, 내가 뭐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고 말 몇 번 섞어보면 판단할 수는 그런 경지와는 거리가 머니, 잘 모르겠네. 어찌 알겠어? 달랑 하루 보고.
나와 태홍이 도편수에 대해 가타부타 설왕설래해봐야 그 이야기에는 정작 그는 없고 나와 태홍이 있을 뿐이다. 도편수가 그 일행들과 내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 속에 나는 없고 그들만이 있는 것처럼.(25)

괴산의 갓 지은 한옥에 머물고 있다. 은근한 나무 냄새가 좋다. 이 땅의 육송陸松을 전통방식으로 다듬어 잇고 끼우고 얹었다 한다. 실내는 생활의 편리함을 염두에 두어 아파트 구조를 차용했다고. 일종의 절충 개량형인 셈이다. 군살과 치장 없이 필요한 만큼만 갖추고 있어 정통이 아니라고 얕잡게 보이지는 않는다.
한옥을 지은 도편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많다. 목소리도 크다. 술잔을 주고 받으며 주로 그가 이야기하고 나는 배우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갸우뚱거리기도 하며 듣는다. 말머리와 꼬리에 자주 '반드시'를 붙여 사용하는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보는 시선 등에 자기 확신이 배어 있다.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다. 나는 말이 많은, 더구나 목소리가 큰, 더더구나 자기 확신에 찬 사람에게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아왔는데, 그건 지레 선을 긋는 내 취향일 뿐이로구나. 말의 많고 적음과 소리의 높고 낮음, 말하는 태도와 습관 등은 형식에 불과하겠지. 마음과 뜻이 진정眞正하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뭔 대수겠는가. 그리고 하루 만에 어찌 저 이의 진정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24)

처가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한 프로그램에 김연자씨가 출연해 '수은등'을 부른다. 옛 생각이 난다. 오래고 오래 전, 포천 비읍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된 그의 단칸 신혼방, 조촐한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었지. 상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간드러지게 부를 때, 작업실 벽이 저 멀리 물러나 길이 되고 수은등이 톡 - 톡 - 톡 - 차례로 켜졌었지. 우리가 서 있던 이십대의 끄트머리 길이 밝아지는 것 같아 황홀했었지. 노래를 부르며 슬쩍 훔쳐 본, 그때 내게 와 머물던 이응은 보일 듯 말 듯 몸을 흔들며 반짝이는 입술을 달싹였었지. 막걸리가 달콤했고 취기가 수줍었던 어느 겨울의 밤. 그때, 왕방산 위에 별이 떴었던가? 몇 해 전, 황망히 세상을 떠난 비읍은 편히 쉬고 있을까? 남아서 아이 둘을 키우며 약자의 싸움에 미술로 참여하고 있는 미음은 궁핍하지 않을까? 피터팬을 찾아 떠나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는 이응은 팅커벨이 되었을까?
헌데 생각을 불러일으킨 노래가 생각을 방해해 더 잇지 못한다. 쉰이 넘은 그녀가 부르는 '수은등'은 듣기 거북하다. 멋과 기교로 인해 삼십 년 전의 그 풋풋함과 애틋함, 간지러움을 느낄 수 없다. 시술과 화장으로 인해 지나온 세월도, 지난 날 생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중년 여성의 얼굴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노래를 듣다말고 욕실로 가 내 얼굴을 본다. 지난 해 부쩍 늙고 푸석해진 얼굴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나이만큼의 깊이도, 생기와 풋풋함의 기억도 찾을 수 없어 스스로에게 민망하다. (23)

새해에는, 삐뚤어질 테다!(22)

아버지 집 소파에 앉아 거실을 오고 가시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 깜작 놀란다. 당신들의 몸이 언제 저렇게 작아졌는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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