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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2. 6. 1. 09:41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집 한 채가 있었다. 이 집에 한 할머니가 홀로 살았었다. 머리카락은 희고 듬성듬성하고 허리는 잔뜩 굽었으며 거동이 불편했다. 몇 해 전 남편과 사별하였고 자식들은 모두 서울과 춘천 등지로 나가 흩어져 살고 있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시집 와 시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술과 바람, 노름으로 집을 비우던 남편 대신 홀로 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건사했다 한다. 늘그막에 집으로 돌아와 정착해 무노동으로 일관한 병든 남편의 수발을 들었다 한다. 자식들은 가끔 들러 할머니 집에서 무엇이든 한 톨이라도 더 가져가려 애를 썼다고 한다. 며느리는 전기밥솥도 이불이며 옷 등도 빼앗듯이 가져갔고 공공연히 노인네 얼른 죽으라고 떠들고 다녔다 한다. 엄마가 가끔 음식을 준비해 내려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하셨는데 지난 해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후로 한 해 동안 비어 있던 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은 하룻만에 부서졌다. 주저앉았다. 땅 주인이 캠핑카 사업을 한다고 일대를 밀어버렸다. 무덤 하나 크기의 쓰레기 더미가 된 집. 그 파편들 틈에서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반짝인다.(29)

엄마를 모시고 홍천읍내 절에 와 있다. 절은 아담하고 깨끗하나 주변 풍경이 우후죽순 네모난 건물들과 각양각색의 간판들, 오고 가는 차들이니 낯설다. 엄마로써는 하루에 다섯 번 있는 버스를 타고 한 번에 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 선택하셨으리라. 엄마를 따라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한다. 어쩌다 절을 찾게 되었을 때 법당 앞에서 서성거리다 짧은 합장을 하고 이내 도망치듯 물러서곤 했는데 실내로 들어오기는 처음. 바삐 절을 하고 나가 절하시고 향을 피우시고 합장하시는 작디작은 엄마를 본다. 엄마 엄마, 내겐 엄마가 부처예요.(28)

팔만대장경판을 모두 모아 부수고 태워 한줌으로 만들고 나면 오로지 한 글자가 남는데 그것이 '心'이란다. 마음,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27)

티브이를 본다. 다르마. 프로그램 초입 부분에 죽음을 앞둔 부처가 그의 제자 아난다에게 했던 말을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슬퍼하지 말고 탄식하지 말라. 마음에 드는 모든 것들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없어지고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아난다여'가 반복해 나오는데 그 '아난다여'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아 두근거린다. 뭉클하고 먹먹하고 막막하다. 허기가 진다. 부처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이놈. 네 이놈. 야일이여'(27)

엄마는 배구경기를 좋아하신다. 시즌이 되면 시간이 되는 데로 챙겨 보시는데 정작 응원하시는 팀은 없다. 팀 순위에서 하위에 있거나, 경기에서 밀리고 있는 팀을 응원하신다. 요즘 내가 그렇다.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꼴찌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고 있다. 힘내라. 꼴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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