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1

노트 2012. 9. 14. 12:42


깊은 밤, 집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작은 면, 작은 리의 한 귀퉁이. 나와 친한 것은 가족 외에는 없는 곳. 구름은 어둡고 뭉실뭉실한 외등은 고인 물에서 더욱 선명하다. 비현실의 한 구석 같다. 나는 왜 여기 서서 이 꿈인 듯 아닌 듯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태홍과 아이는 왜 저기 네모나고 좁은 방에서 잠들어 있는가?(01)

아이와 옥상에 올라 노을을 본다. 아이는 "아빠, 조금만 불타요." 실망해한다. 둘러보니 네 개의 붉은 십자가가 높거니 낮거니 마을 제일 높이 서서 빛을 발한다. 문득 생각한다. 그 어떤 종교나 이념이나 신념도 높이 서서 홀로 반짝이며 우러르고 따르라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빛은 낮은 곳에서 눈부시지 않게 은근히 밝아야 한다.(03)

사람들에 섞여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선다. 옛날 두벌식 타자기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놓여 있다. 아이는 타자기로 다가가더니 이내 두드리는 데 빠져 한참을 탁탁거린다. 군 행정반에서 두벌식 타자기로 한 자 한 자 꾹꾹 누르며 썼던 글들이 떠오른다. 그 진심들....... 다 어디 간 거니!(06)

정안당 마당에 둘러앉아 술을 마신다. 사색적인 아이라 오해되었다 초절정 명랑소년으로 판명된 아이는 하루 종일 까불거리다 사랑채에서 잠들고 하늘은 칠흑이다. 술 한 잔 마시고 하늘을 볼 때, 별이 없음을 탄했으나 익숙해지니 그 막막함도 그리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무슨 인연이기에 여기 남도의 깔끔하고 오래된 한옥에서 편안히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까? 인연을 붙잡으려 애쓸 일을 아니지만 그저 무상한 것이라 내칠 것만도 아니구나. 미음엄니의 말을 되짚어본다. "내 아이들과 거리를 두려고 해요. 나이 들면서 그 거리가 자연스레 조금씩 멀어지지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예요."(08)

일어나 앉아 있으니 마을 확성기가 무언가를 알리느라 큰소리를 낸다. 여섯 시 반.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들고 나선다. 노르스름해지는 논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왜가리인가? 흰 새 몇 마리 무리 지어 길에 앉아 있다 인기척에 날아오른다. 천천히 걷고 있노라니 왠지 눈이 빨개진다. 요즘은 반성의 시절. 익어가는 이 넓은 들녘과 저 멀리 희미한 월출산과 건너 수인산과 이 잠잠한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지나온 날들을 헤아린다.

히읗씨와 지읒씨가 먼저 서울로 떠난다. 그들이 탄 택시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한 마디 툭 튀어나온다. "가부렀네." 아이가 중심이 되어버려 민망했고, 왠지 미안하다.(09)

정안당을 떠난다. 마을회관 앞으로 나온 아이는 가기 싫다며 집으로 뛰어가기를 몇 번. 남쪽에 불쑥 찾아와도 그냥 반가워해주는 곳이 있다 생각하시라는 미음엄니의 말씀이 고맙다. 돌아가면 이내 일상에 묻혀 더욱 그러하겠지? 몽롱한 꿈같은 이틀이었다.(10)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12  (0) 2012.11.22
12111  (0) 2012.11.10
12063  (4) 2012.07.02
12061  (0) 2012.06.12
12053  (0) 2012.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