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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2. 11. 22. 13:53


주역에 능한 이에게 태홍이 내 사주를 보여주었단다. "그 사람, 당신 사주를 넣고 프로그램을 돌려 보더니 이내 노트북을 탁 덮고는 말하더군요. '이분은 자신이 아주 소중한 분이셔요. 옆에서 같이 사는 사람이 힘들겠네.' 당신도 말하곤 했잖아. 자신을 짝사랑한다고."(18)

나도 마흔 일곱 처음이야. 처음 만나는 나고 나이라고. 때로 낯설고 당황스럽다고. 가장 늙었으면서도 가장 젊고 오랜 산 것 같으면서도 당장 내일이 처음인 사람이라고. 노련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마셔.(16)

친구가 말한다. "어느 절, 뭔 처사인가 하는 사람하고 술을 마시는데 맨 부처 왈, 공자 왈, 장자 왈, 하는 거야. 알딸하게 취한 김에 딴지를 걸었지. 거, 다른 사람 빗대어 왈왈거리지 말고 당신 얘기 좀 해 보쇼.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 멱살을 잡더라고. 워 워, 진정시키고 나서 일어나 나왔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생각이 난다. 만일 글을 써 책을 낸다면 인용구 하나 없이 만들겠다던.(16)

한때 몇 년 붙어 지냈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른 봄에 프랑스로 가 머물다 엊그제 돌아왔다고. 그간 연락 못한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기를 덮은 후 생각한다. 왜 다녀왔는지 성과는 있었는지 묻지 않았구나. 섭섭하려나? 언젠가 이 친구를 만난 후 이렇게 썼었다. 이제는 더 이상 들어줄 눈물이 없어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고. 묘한 습성이다. 가까이 지내던 이들도 그들의 삶이 안정되고나면 마음에서 천천히 희미해져간다. 안녕한 그들 또한 나를 찾지 않으니 더욱 그러하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 마음에 그들이 미미하다는 건 그들이 제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도 비어 좋고 그들에게도 그게 행복이니 서로 좋다 치자. (14)

중앙선 전철 안, 내 뒤로 작업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 둘이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눈다. "거, 누구였드라? 문 뭐시기 있잖아. 문익환인가? 왜 거, 통일교." "문선명이지. 죽었잖어." "죽었다고?" "몇 달 됐지." "아까워 으찌 죽었으까?" "아깝다고 안 죽나? 쌀 한 톨 못가지고 가는 게 저승인디 으쩌겄어. 뭐, 다 자식들에게 넘겼겄지." "다른 하늘나라 가면 구박받을 테니 통일교 하늘나라로 갔을라나? 거기서도 왕 노릇 할라나?" "하늘나라가 어딨어. 왕은 또 무슨 왕. 내 보기엔 말여, 천국이니 지옥이니 없어야 죽음이 진짜 공평해지는 거여. 살아생전 뭐 믿노라 떵떵거리다 죽어서도 더 살고 더 잘 살라고 애쓰는 건 고약한 심보여. 글고 정말 그리되면 그거야말로 우리덜 입장에서는 정말 뭣 같지 않겄어?"(13)

양주에서 묵고 있다. 비바람이 거세다. 문을 꽁꽁 닫았는데도 바람이 어느 틈에서 얇고 뾰족한 소리를 내고 있다. 부산의 바람이 떠오른다. 사람을 잃고 떠돌다 사직구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먹고 자며 일했었다. 세찬 바람이 잦았었다. 숙소를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에 잠을 설치던 그때, 일기에 이렇게 썼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바람을 ‘할퀸다’, ‘쓸어버린다’ 등의 공격적인 타동사가 아닌, ‘분다’, ‘흐른다’ 와 같은 유한 자동사로 읽을 수 있을까? 벌써 스무 해 전의 일이다. 그나마 자라서 바람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깨닫고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지는 않지만 휘청거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온유는 아직 먼 이야기다. (11)

창문을 연다. 밤새 비몽사몽 소곤소곤 귀에 내려 좋던 비가 잠잠해졌다. 안개에 가려 세상은 하얗다. 물든 낙엽송만 희미한 금빛으로 서 있다. 만일 천계天界가 있다면 이럴 것 같다. 고요하고 아득하고 흐리고 묽고 담담하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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