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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2. 11. 10. 01:28


작가의 기술에 관한 열세 가지 테제
1. 뭔가 큰 작품을 쓰려는 사람은 여유를 가질 것. 일정한 분량을 마친 후에는 글쓰기의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할 것.
2. 원한다면 지금까지 쓴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좋지만, 아직 진행 중인 글은 다른 사람에게 읽어 들려주지는 말 것. 그것을 통해 얻게 될 모든 종류의 만족감은 너의 템포를 늦출 것이다. 이 요법을 따른다면 자기 글을 보여주고 싶은 점증하는 욕망이 결국 완성을 위한 모터 구실을 할 것이다.
3. 작업 환경에서 일상생활의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피하도록 노록할 것. 맥 빠진 소음을 동반한 어중간한 고요함은 오히려 품위를 떨어뜨릴 뿐이다. 그에 반해 연습곡이나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동반되는 경우, 그것은 뚜렷하게 지각할 수 있는 밤의 적막만큼이나 글쓰기에 중요할 수 있다. 한밤의 적막이 내면의 귀를 날카롭게 한다면 전자는 글 쓰는 방법의 시금석이 된다. 그것이 아주 풍요로워지면 어떤 기괴한 소음조차도 안에 묻혀버리게 된다.
4. 아무것이나 집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피할 것. 특정한 종이, 특정한 펜, 특정한 잉크를 까다로울 정도로 고수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용구를 풍부하게 갖추어놓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5. 떠오르는 어떠한 생각도 부지불식간에 지나가도록 하지 말 것. 메모장에 노트를 할 때는 관청들이 외국인등록부를 기록할 때처럼 엄격하게 할 것.
6. 너의 펜이 떠오르는 착상에 대해 까다롭게 굴도록 할 것. 그러면 펜은 자석과 같은 힘으로 그것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때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신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그것은 한껏 펼쳐진 채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말(이야기)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문자(글쓰기)는 생각을 지배한다.
7.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멈추지 말 것. 어떤 일정을 지켜야 하거나 아니면 작품을 끝마쳤을 때만 중단하는 것이 문학적 명예의 준칙이다.
8. 더 이상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동안 쓴 것을 깨끗이 정서할 것. 그러는 동안에 직관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9. 단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할 것. 하물며 몇 주일씩이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10. 저녁부터 꼬박 다음 날이 밝아올 때까지 매달려보지 않은 어떤 글도 완벽하다고 간주하지 말 것.
11. 작품의 결말은 평상시에 일하던 방에서 쓰지 말 것. 거기서는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12. 집필의 단계들 ― 생각, 문체, 집필. 정서淨書라는 고정 행위에서는 이미 주의력이 글자의 아름다움으로만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정서의 의미이다. 생각은 영감을 죽이고 문체는 생각을 속박하며 집필은 문체에 보수를 지불한다.
13. 작품은 구상의 데스마스크이다. - 발터 벤야민(09)

얼마 전 친구가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관한 강신주의 강의를 들을 때 받았던 문건을 모아 주었다. 잊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전철에서 수첩을 찾느라 가방 뒷칸을 뒤적이다 손에 걸려 읽는다. 때로 멈추어 생각하고 되새기기도 하지만 대개 훑어보며 넘어가다 ‘작가의 기술에 관한 열세 가지 테제’란 글을 만난다. 작가가 글을 쓸 때 견지해야 하는 태도와 기술에 관한 13개의 단문이다. 생각을 환기시키는 매력적이고 적확한 문장들이다. 벤야민에 공감하며 흥미롭게 읽는데 불쑥-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콩 뛴다. 곧이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놀란다. 회한일까, 기대일까? 어쨌든 간에 글쓰기에 대한 내 무의식적 욕망이 이렇게 간절했단 말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08)

구만리를 걷는다. 九萬里일까? 아니면 또 어떠하랴. 그 길고도 긴 거리를 가는 나그네 같아 잠시 즐겁다. 나그네는 모름지기 두리번거려야 하는 법. 풍경을 본다. 탄성이 새나온다. 가을의 산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색이 저렇게 다양하고도 서로 통했던가? 선명하고도 고요했던가? 가을 깊은 곳에 처음 와 있는 듯 가슴이 싸하다. 이 계절, 참 신기하구나. 산그늘에 속하면서도 햇빛을 받아 점점이 틈틈이 밝은 나무들을 보며 생각한다. 가을이 지는 계절만은 아니로구나.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도 절정이구나. 계절이 그러하듯 사람도 그러하리라. 어떤 결말을 향해 늙어가는 것도, 순리에 따라 퇴색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순간이 순간으로 이동하는 끝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고, 순간마다 떫고 싱싱하고 무르익어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04)

십팔 년 전 처음 만났다. 십삼 년 전부터 같은 곳에서 일했고 팔 년 전부터는 구의동, 중곡동, 내곡동, 용천리를 전전하며 단 둘이 함께 지냈다. 그리고 오늘 송별주를 마신다. 작업실을 폐하고 일자리를 얻어 며칠 후면 서울로 출근한다. 더 오래 함께 하는 꿈도 꾸었고 계획도 세웠으나 내가 부족했고 커트라인을 지키지 못했다. 훌쩍 떠나 미안하다. 그리고 여러모로 참 고맙다. slowlee! 자네도 언제 떠날지 모를, 혹은 뿌리박을 지도 모를 용천리, 만끽하시고 무엇보다 건강하시길.(02)

중고서점 알라딘. 책 사이를 이리저리 걷다 전신 거울과 맞닥뜨린다. 문득 네 생각이 난다. 이 짧고도 어두우며 헐렁한 사람을 왜 사랑하는 거니? 돌아서며 생각을 잇는다. 누구든, 심지어 부적절한 관계더라도 연을 맺고 있다면 우선 정精과 성誠을 다해야 한다. 어느 한 순간에 부질없이 끊어진다 해도.(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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