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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4. 4. 5. 13:00

꿈. 몇몇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서 각각 긴 대롱을 땅에 대고 입으로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도 그러했는데, 그 대롱 끝에는 아기씨가 조그만 씨앗처럼 동그랗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훅 훅 - 힘을 주어 대롱에 숨을 불어넣으니 아기씨가 조금씩 자라나 수족과 이목구비를 갖춘 태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눈을 뜨고 검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사타구니에서는 고추가 달랑거렸다. 사온을 닮았으나 앞니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눈을 껌뻑이는 그 아이를 신기해 하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같이 대롱을 불던 사람들 중에 몇몇아 아기씨를 살려내지 못해 울고 있었다.(19)


아주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가 여럿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좌중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홀짝이다 취기가 오르니, 오고가는 열변과 주고받는 치하와 수다가 공허해 헛헛하다. 그야말로, 아! 병인 양 하여라!(18)


그 사람은 봄이면 그저 봄 얘기를 하고, 여름이면 남 얘기하듯 여름을 얘기해. 가을이면 덤덤히 가을에 대해 얘기하고 겨울이면 조용히 겨울 이야기를 하지. 덧붙이는 말이 없어.(16)


아버지와 휴채널을 시청하며 술자리를 마무리한다. 화면에는 끝없는 사막과 거대한 협곡, 적막한 불모지들이 고요한 음악과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득 생각한다. 저 황량한 땅 한 가운데 집에 돌아갈 계획 없이 서 있다면, 저 허무하고도 경외로운 자연에 한 점으로 놓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15)


발톱은 왜 이리도 속절없이 자라는지.(13)


건축가를 만났다. 나름의 뜻을 가지고 비주류를 택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늘 딸랑 '대졸'이라는 학력에 발목을 잡히는 사람이다. 그가 막걸리를 앞에 놓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시적인 것까지, 농담에서 철학적 개념까지 수다를 떨었는데 이야기 중에 종종 '자수'라는 표현을 썼다. 타인에게 자수하라고 권유했던 에피소드와 스스로 자수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자수 - 학력 외에 그가 아웃사이더인 강력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자기반성이 매력적이면서도 안타까웠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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