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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4. 10. 23. 15:16

02.  끝났으려니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서니 미술가들이 아직도 전열을 갖추고 앉아 있다. 작가와 이론가, 큐레이터로 이루어져 있는 면면들이 한 작가의 품평회를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므로 가만히 앉아 끝나기를 기다린다. 철학과 미술계의 전문용어들이 술잔과 함께 오고 간다. 라틴어처럼 생소하다. 알아들을 수도, 알아듣고 싶지도 않다. 그저 벽 액자에 쓰여 있는 고은의 시 한 구절만 보고 또 본다. 「최고의 서쪽으로 아내의 하루가 간다 내 하루가 울며불며 간다」

06. 
아이와 원이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나는 나로 태어난 게 잘 한 거 같아." 원이 묻는다. "어떤 점이 그래?" 아이가 답한다. "왜냐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고맙다.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08.
  한 걸음 한 걸음 안개를 걷어내며 뒷마을을 걷는다. 엷은 수묵처럼 안개에 스며있던 나무가 서서히 제 색과 수족을 드러낸다. 안개 때문일까? 문득 입체로 존재하는 세상과 내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가도가도 나무가, 그 곁에 서도 나무가 그저 평면의 잿빛 그림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괴하기도 하겠지만 가볍고 편안할 것도 같다. 스스륵 스르륵 - 남자 하나 뱀처럼 자전거를 몰아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10.  작업실로 걸어가는 길에 색다른 모퉁이를 돌다 놀란다. 만개한 가을꽃들이 한 집의 외벽을 둘러싸고 풍성하게 피어 있다. 이 마을에 이런 꽃들이 피어 있었던가? 꽃들이 도톰한 동산처럼 보인다. 그리고 곧이어 꽃들이 강물처럼 보인다. 집을 돌아 굽이굽이 흘러 멀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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