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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4. 11. 4. 10:07

21
 아이와 낙엽을 줍는다. 아이는 엄마에게 선물하겠다며 새빨갛고 깔끔한 것들을 고른다. 구부러진 아이의 조그만 허리를 보면서 문득 생각한다. 아이의 하루에도 때로 낙엽과 노을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웃음과 발랄만을 보려는 건 내 욕심이며 게으름일 뿐이다.

22  전시장에서 작품을 철수하고 안내 테이블에 놓여있는 미술잡지를 집어 가방에 넣었다. 멀리 떠나있어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술계의 동향을 훑어볼 요량이었다. 헌데 작업실에 돌아와 꺼내 펼쳐보니, 공허했다. 잡지를 덮으며 입밖으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그래서, 뭐!"

23  옥상에 오르니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것처럼 차고 거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리온이 빛나고 있다. 왼쪽 위에 붉게 보이는 것이 온이 좋아하는 적색거성인 베텔기우스고, 오른쪽 아래 반짝이는 것이 푸른 리겔이렸다. 베텔기우스는 태양보다 700배나 크다고 했던가? 관측 가능한 별 중 가장 큰 별인 vy 캐니스 메져리스의 지름은 태양의 1450배, 밝기는 50만배, 지구와의 거리는 50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어쨌거나 오리온이 하늘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걸 보니 곧 겨울이로구나.

25  강남터미널 꽃시장에서 보리 조화를 구입하고 양평으로 돌아가는 중앙선. 세 명의 중년 여성들이 전철에 올라타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둘러보더니 나눠 앉았다. 잠시 후 내 옆에 앉은 한 여성이 내게 자신의 일행과 자리를 바꾸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냥 가시라고 말했다. 무슨 심보인지는 모르겠으나 꼭 한 번 그렇게 하고 싶었었다. 왠지 짜릿했다.

28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날아라 병아리. 인형의 기사.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까페. 이중인격자. 그대에게. 안녕. 일상으로의 초대. 도시인, 먼 훗날 언젠가. 아버지와 나. 집으로 가는 길........ 내가 불렀던 그의 노래들이다. 명복을 빈다.

30  오랜만에 아신역으로 걸아가는 길. 낡은 블럭담을 덮은 이끼가 침침하다. 여름의 그 밝던 이끼들이....... 아!  이끼들도 그때 찬란했었던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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