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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5. 7. 25. 05:57

31  투습방수지를 두르며 골조骨造 작업을 마쳤다. 다섯이서 열흘 동안 더위와 싸우며 애썼다. 헬퍼로 힘을 보탰다. 웃옷을 벗어 꾹꾹 땀을 짜내며 뼈대가 완성된 집을 보다 문득 생각한다. 뼈대는 제각각 역할에 따라 림, 래프터, 페시아, 실링, 플레이트, 헤더, 트리모, 브로킹, 고막이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못과 나사로 연결되어 있다. 허공에 홀로 존재하는 건 없다. 모두 엮여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니어서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공空은 ‘나’라는 독립된 실체가 비어있으므로 가득 찰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 했던가? ‘모든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내 삶의 ‘나’도 수없이 많은 ‘나’가 되기 위해서 ‘나’가 없어야 한다고 했던가? 물음의 나날들이다. 

 

 

 

28  이른 아침, 작고 수줍게 만발했던 패랭이들이 저무는 길에 달맞이꽃들이 대롱대롱 노란 꽃을 피워 여기저기 점점이 노랑이다. 무리지어 피어도 키가 각각인 것은 달을 향한 열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 생각한다. 아침에도 낮에도 꽃을 피워 달을 좇는 달맞이꽃, 네가 있어 달이 있고, 달이 있어 네가 있는가? 그래서 내가 있는가? 정말 달과 달맞이꽃과 나는 연결되어 있는가?

  

 

 

2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덧없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이탈리아의 백운암 산맥을 산책하던 일을 회고한다.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꽃들이 만발하고 초원 위에서는 화려한 색깔의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야외에 나와 기뻤다. 하지만 그의 동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산책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릴케가 주변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나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릴케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 겨울이 오면 사라진다는 것,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릴케에게 공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곧 스러질 것이라 하더라도 뭔가 매력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건강성의 증표였다. 그러나 릴케의 입장은 비록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특히 아름다움의 덧없는 본질을 의식하고 또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 있다는 점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런 우울한 열광자들은 커튼 조각에서 좀이 먹는 구멍을 보고, 설계도에서 폐허를 본다.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정영목 옮김, 이레, 16쪽

 

23  비는 오지 않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네 남자는 모두 웃옷을 벗었다. 집의 뼈대를 세우며 비와 바람을 기다렸다. 늦은 오후가 시작될 무렵, 마침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홍목수는 늑대처럼 환호를 했으나 곧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마침 쉴 시간이어서 담배를 뻐끔거리며 빗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온전히 빗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였더라? 명료하고 간단하며 미련 없는 점들이 따닥따닥 수없이 박히는 소리.

 

 

 

21  원이 말한다. 아침에 가만히 앉아 숨을 들여다보며 호흡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방금 전에 쉰 숨이 바로 전생이 아닐까? 하는. 무상한 ‘나’는 순간에만 존재하니까. 삶이란 게 길게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톡톡 끊어지는 점들의 향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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