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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5. 8. 4. 00:21

10  허름한 창문 앞에 서서 흘러내린 도료 자국을 보다 문득 생각하기를,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것들은 대개 서글프다. 그건 아마도 태초의 감각일 것이다. 무에서 비롯된 이 세상이 허무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중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삶에 대한 무의식적인 서글픔.

 

 

 

07  온이 한 살 때 갔었던 제주도, 반겨주고 챙겨주었던 지읒이 페이스북에 그때 온이의 사진을 올리고는 ‘이 아이의 지금이 궁금하다는.’이라며 안부를 물었다. 댓글로 요즘 온이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잊고 있던 아이의 그 시절을 되새기며 그때 했던 갓난 부모의 다짐들을 떠올려보니, 지금 온이에게 미안할 따름.

 

 

 

05  오랜만에 뒹굴뒹굴 책을 읽었다. 졸리면 책을 덮고 잠을 잤고 깨어나면 다시 읽었다. 새가 날고 집을 짓는 꿈을 꾸기도 했다. 조그만 선풍기에 의탁한 채 읽은 책은 [틱 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윤회에 대해 물었을 때 무연스님이 추천해준 책이다.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통찰이 담겨져 있는 이 책의 핵심은 공空. 비어있으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 공은 곧 공존이라 했다. 몇 번에 걸쳐 읽고 또 읽은 구절이 있다. 잡히지 않는 윤회의 개념에 대해 화두로 삼아 생각해 볼만하다.

 

나는 명상을 하며 전생에 내가 구름이었음을 봅니다. 내가 전생에 구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도 내가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구름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구름이고 강물이고 공기입니다. 그러므로 전생에 나는 구름이고 강물이고 공기였습니다. 나는 바위였으며, 물속의 광물질이었습니다.

이것은 윤회에 대한 믿음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지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기체였고, 햇빛이었고, 물이었고, 버섯이었고, 식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세포 동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전생에 한 그루의 나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물고기였고, 한 마리의 사슴이었습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전에 구름이었고 사슴이었으며, 새였고 물고기였습니다. 우리는 전생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그들이 됩니다.-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틱 낫한/강옥구/도서출판 장경각/2003

 

03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멀리 뉴질랜드에서. 딸 하나 데리고 홀로 건너가 6년, 이제 자리를 잡을 만하다 했는데 암을 이기지 못하고 고요히 떠났다. 죽음이란 게 끝도, 시작도 아닌 변화의 한 점이라지만 홀로 견디었을 그녀의 죽음은 마음이 아프다. 명복을 빈다.

 

02  컴퓨터 책상 위,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옆에 원의 조그만 메모장이 놓여져 있다. 들여다보니 파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양평수목원 캠핑장. 솔뜰 캠핑장. 강씨봉 자연휴양림. 코베아 버너 3웨이올인원. 가스레인지.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는다.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 올댓이즈...... 바람이 보인다.

 

01  한 때 애인이었던 이응형 모친상이 있어 강릉에 내려와 망자에게 절을 드리고, 평창비엔날레를 엮느라 바빠 볼 수 없었던 형과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차를 몰아 주문진의 미명, 허름한 여관에 누워 있다.

20여 년 전의 늦겨울, 계획도 없이 형과 7번 국도를 달렸었다. 미시령을 넘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었고, 양양 초입의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차 지붕까지 눈이 쌓였었고, 눈에서 차를 꺼내 울진을 거쳐 구성포까지 갔었다. 20대의 끝무렵. 그때 썼던 일기를 꺼내본다.

 

눈을 뜬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바다로 가는 몇몇 길이 군데군데 끊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부스스 일어난, 벽지의 꽃무늬가 묻은 그가 움직인다. 이불을 쓴 채 방을 살핀다. 공삼구육육칠일에삼삼구이 양양 오색주유소달력, 밤색 장롱, 그의 옷이 걸려 있는 옷걸이, 거울을 얹은 화장대, 그 위에 빨간 전화기와 티브이, 두루마리 화장지, 그 사이로 사이렌이 울고, 분홍커튼이 달려 있는 창문, 물과 컵, 성냥, 담배와 지갑, 호출기, 감 두 개, 헤어젤, 동전들, 분홍 쓰레기통, 카메라, 그가 기고한 이대학보, 맥주와 오징어가 담겨 있던 비닐봉지, 흰 수건과 라이타, 필름통, 재떨이, 그의 가방,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들. 그는 목욕을 하고 그 사이 찬찬히 방안을 그리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나 픽 - 웃는다. 이런 나를 떠난 너는 잘 있는지. 망가진 핀은 여전히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지, 피처럼 붉다고 좋아했던 그 빨간 운동화는 여전히 선명한지. 너무도 끈끈하여 때로 징그럽던 사람들과 오늘도 즐거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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