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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5. 8. 22. 05:58

31  말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말들이 쓰레기가 되어 교각에 걸리곤 했다. 말들이 징징거렸다. 그렇게 한 무리와 만나고 헤어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무도 몰래 내 속으로 들어가 달과 노을과 그림자와 신호등과 놀았기 때문. 누구도 내가 홀로 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27  대관령하늘목장. 트랙터에서 내렸다. 바람이 거셌다. 풍력발전기는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묵직하게 돌아갔다. 트랙터에 함께 몸을 실었던 이들은 1000고지 주변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우리는 한 발 두 발 정처 없이 내딛다 아예 선자령까지 가보기로 했다. 언덕과 숲을 지나 백두대간 주능선에 위치한 해발 1157미터의 선자령 정상에 올랐다. 멀리 강릉 시내와 바다가 보였다. 풍경을 보며 아이가 말했다. “끝내준다. 입이 딱 벌어지네.” 바위 위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춤도 추었다. 다시 1000고지로 내려오니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즐겁게 함께 걷고 산을 오르내린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원이 말했다. “여행에 또 이리 죽이 잘 맞네.” 내친김에 안목해변으로 가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왔다.

  

 

 

25  자아가 자아가 아닌 요소들로만 이루어졌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부처님은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는 자아 없이 있다 You are without self"라고 하셨지요. 비자아non-self가 여러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그분이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은 맨처음 사랑이 아니다/틱낫한/이현주/나무심는사람/2001

 

24  어제 원소리에 다녀왔다. 엄마가 옥수수, 토마토, 고추, 호박, 가지, 노각 등과 오이김치와 물김치, 꽈리고추볶음 등을 챙겨주셨다. 오늘 아침, 반찬으로 먹어볼까? 오이김치가 담겨있는 통을 열었다. 이런, 센스쟁이 엄마 같으니라고! 빨간 오이김치 위에 하얀 부추꽃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참 바라보다 먹지 못하고 가만히 뚜껑을 닫아두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그 부추꽃이 아주 작은 잔에 담겨 있었다. 원이 말했다. "오이김치 먹으려고 열었는데 하얀 꽃이 있지 뭐예요. 꽃도 어머니 마음도 예쁘고 고마워서 온이한테, 할머니께서 너 맛있게 먹으라고 사랑하시는 마음까지 같이 보내셨네, 보여주고는 저녁을 준비하다 돌아보니 온이가 합장하고 기도를 하고 있네? 곧 눈을 뜨길래 어떤 기도를 했는지 물었더니 이러는 거 있죠? '할머니, 사실 때는 건강하게 사시고, 죽으실 때는 행복하게 죽으세요,라고 기도했어.'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마음이 일렁이면서 감동했잖아. 죽지 마세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도 아니고 건강하게 사시다 행복하게 돌아가시라니. 하, 요 놈이 정말, 스님 말씀대로, 내 스승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22  아침을 먹고 옥상에 올라 멀리 용문산과 하늘의 구름들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일과가 되었다. 오늘도 그러하였다. '흠, 오늘 용문산은 안개에 가려 보이질 않네. 구름들도 넓디넓은 것이 그저 막막하네.' 담배를 탁탁 털고 현장으로 나설 채비를 위해 내려가려는데 어디선가 콩 콩 콩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두리번두리번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나무의 잠잠하고도 밝은 꽃들과 아직 남아 있는 어둠, 그 사이에서 쉬엄쉬엄 움직이며 밭을 손보고 있는 할머니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라는 게 정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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