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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2. 21. 19:32

29. 누군가, 순간일지라도 마음을 다해 나의 안녕을 원하며 기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들으면 코끝부터 찡 - 울리곤 한다. 미음님의 답글을 보고도 그러하였다. 헌데 그 분위기가 지금껏 하고는 다소 달랐다. 분명 살짝 울컥하기는 했으나 이내 좀 명랑해졌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들판을 걸으면서 때로는 바닷가를 걸으면서 꼭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미음님의 글을 읽으며, 까치내의 들판과 남쪽 바닷가가 그려졌고, 그 길을 걸으며 속삭이듯 기도하시는 미음님의 뒷모습도 보였다. 풍경은 맑고 채도가 높았으며 가벼웠다. 더구나, 글 끝의 '^^'이 갈매기가 되어 훅 - 바다 위로 날아갔고 그 광경에 나는 크득- 웃었던 것이다.


28. 긴 복도를 오고가며 달린다. Brad Mehldau Trio의 연주를 들으며 바퀴가 멈추지 않게 팔을 젓는다. 3,000미터를 달리고 천천히 선다. 어깨가 뻐근하다. 피아노와 드럼과 콘트라베이스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재즈가 몸과 가까운 음악이구나, 생각한다. 달리기 시작할 때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쌀알쌀알 눈으로 내리더니 펑펑 함박눈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흠- 오늘 밤에도 눈길을 걸어야 하는 건가? 흠- 어디가 좋을까? 흠- 불광천길을 걸어 한강으로 나가볼까? 자주 걷던 길이니 해가 뚝 떨어져도 돌아오는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27. 일어나 앉아 창밖을 보니 눈이 내렸다. 풍경이 수많은 농담의 흑백이다. 그래! 오늘은, 눈길을, 걷자. 생각해보니 그동안 걷던 머리속 길에는 기후가 없었다. 녹음도 없었고 바람도 없었고 온도도 없었으며 소리도 없었다. 오직 걷는 두 다리거나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이왕 눈도 내렸으니 오늘은 마음에 난 길로 보득보득, 좀 춥게 걷자. 용천리로 가볼까?


26. 책이 도착했다. 지읒씨가 병문안 삼아 보낸 책이다. 네 권이다. 손기태가 지은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자유를 향한 철학적 여정」, 로라 커밍이 쓰고 김진실이 옮긴 「화가의 얼굴, 자화상」, 페르난두 페소아가 짓고 오진영이 옮긴 「불안의 책」, 프레데리크 지음 이세진 옮김의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

침상 식탁을 펼쳐 떡하니 올려놓으니 문득 책들이 낯설고 식감이 서로 다른, 미묘하고 독특한 맛의 음식처럼 보인다.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처럼 썰어 먹어도 좋을 것 같고, 채를 썰어 접시에 보기 좋게 올린 후 상큼한 소스를 뿌려 먹어도 그만이겠다 싶다. 삼각 샌드위치처럼 잘라 손으로 들고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화식이 아닌 생식의 맛과 촉감이 날 것 같다. 꼭꼭 씹어 먹어야지.


24. 떡과 과일과 책을 들고 스님이 오셨다. 원의 말을 빌리자면 '먹고 죽을래도 없는 시간'을 쪼개, 평생 챙겨 본 적 없는 음력 생일을 축하해주러 오셨다. 세상에나, 생일 축하노래까지 깜찍하게 불러주셔서 몸둘바를 몰랐다. 

내가 지금껏 그 무언가에 대해 온전하고 지극한 마음을 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스님이 말씀하셨다. "능엄주를 다 외웠다 하니 대단해. 능엄주를 지송할 때 단순하고 명료한 원을 세워 마음을 내 봐요. 주문이나 염불은 마음을 내는 장치이기도 하거든. 삼라만상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들으니까. 어떤 원을 세울까는 야일의 몫." 얼마전 원의 물음이 생갔났다. 원은 대뜸 앞으로 천일 안에 이루고 싶은 일 세 가지를 대라했다.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걷기. 셋의 긴 여행. 책 만들기'.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바람이 떠올랐고 순간 간절해졌다. 간단하지는 않을지라도 명료한 원.


23. 이른 아침, 오늘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재활 가기 전, 아이와 통화하려 전화했다. 원이 받았다. "사온군은 마지막 어린이집 차를 타고 가셨지요. 편지 보여줬어요. 소리 내 읽다 멈추더라고. 아빠 글씨가 읽기 어려워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가만 있다 이러는 거 있죠. '아니. 눈물이 날라고 그래서.' 요즘 부쩍 아빠 아빠 하더니. 어서 돌아오소. 아들이 아빠를 찾아요." 아! 자슥. 울컥했다.


22. 아마도이자람밴드 버전의 「백만송이 장미」를 듣다 처음 알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21. 일요일 오후. 길고 긴 복도 끝에 선다. 새롭게 걸음마를 시작하는 중년의 사내 셋이 더듬더듬 휘청휘청 걷고 있다. 스러지거나 부서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아주 천천이 걷는다. 나는 바퀴여서, 바퀴는 걷지 않아서  빠르게 그들 곁을 굴러 간다. 바람을 일으킬 지경. 허나 팔뚝으로 달리며 그들의 겨드랑이 아래로 지나가자니 좀 서글프다. 바퀴를 멈추고 가만이 있는데 Ahmad Jamal이 높고 경쾌하고 빠르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요즘 생각이 짧아져 이내 마음이 가벼워진다. 고마워, 아마드. 바퀴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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