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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3. 12. 18:19

18. 양평을 떠나 서울에 입성했다. '재활난민'의 두번째 이동. 여기 수유리에서 석 달 머물 것이다. 양평 병실의 짐을 싸며 원과 올해의 시나리오를 다시 짰다. 양평에 몸을 풀며 썼던 시나리오는 어긋났기 때문. 원과 입을 맞춘 새로운 시나리오는 이렇다.「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있는 동안 신경이 돌아온다. 기간을 다 채우고 양평 국립교통재활병원으로 귀환해 걷기 위한 재활치료에 전념한다. 석달 후 통원 치료가 가능해지고, 이후 석 달 통원 치료. 그리고 연말, 그리고 안전한 독립 보행.」완벽하고 달콤하다. 퍼펙트, 스위트 뭐 이런 거 늘 시답지않게 생각해 왔는데, 확 좋아하고 싶다. 


16. 대기실에서 작업치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풍도에 온 봄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쳇! 까짓 봄. 외면하려 할 때, 그때, 화면 가득 연보라 노루귀가 크로즈업 되었다. 줄기의 솜털들이 빛을 받아 환했다. 순간 신음처럼 새나왔다. '아! 노루귀'. 연이어 풍도바람꽃과 노란 복수초가 볕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 봄. 저 섬'.


15. 잠을 깬 온, 원에게 "엄마, 포춘쿠키 뽑아줄까?" 하더란다. 뜬금없는 말에 원이 그러라고 했더니, 머리맡에 있던 동그랗고 조그만 상자를 열고 뭔가 꺼내는 척 하더란다. 상자는 텅 비었고 손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포춘쿠키를 쪼개 종이를 꺼내는 동작을 취하더니 이러더란다. "엄마 오늘 운이 좋은데? 뭐라고 써있냐면, 아들이 말을 잘 들을 것이다." 원이 웃으면서, 뭔 말을 어떻게 잘 들을 건지 구체적으로 얘기해달라고 하니 온이 또다른 포춘쿠키 하나를 뽑아 펼치는 시늉을 하며 이러더란다. "아들이 모든 말을 아주 잘 들을 것이다." 단순한 놈. ㅎ

원이 아빠 것도 뽑아보라 했단다. 알았다며 빈 상자를 제법 신중하게 뒤적여 뽑고는 이렇게 읽더란다. "아버지는 일정보다 빨리 나을 것이다." 기특한 것.


14.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소식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이 이벤트가 인공지능의 진화 과정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한 점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인공지능은 이세돌이 네번째 대국에서 보여준  '인간의 창의성'을 통해 자신의 결함을 체크하고 이내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인류는, 낙관적인 전문가들과 열정적인 개발자들 그리고 음흉한 자본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 대신 여가를 즐기게 될까? 그런 유토피아가 올까? 나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다음과 같은 우려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의 탐욕이며 탐욕을 주요 동력으로 삼는 위험한 체제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날은 올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어진 수익과 여유가 인류의 공동자산이 될 것이란 보장이 없다. - 황해문화편집장 전성원」


13. 삼월의 두번째 주말을 기념해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1번에서 5번 까지 연이어 들었다. 재클린 뒤 프레가 몸이 굳어져가는 병을 앓기 시작하기 직전인 1970년,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연주한 실황앨범으로 유튜브에서 우연히 찾아 가끔, 군데군데 듣곤 했었는데 전곡을 듣기로 한 것. 휠체어를 굴려 복도를 오고가며 음악에 집중했다.

깊지 않고 평범하지만 비교적 원시적이고 인적이 없는 숲을 걷는 느낌이었다. 계절은 늦은 봄쯤? 첼로는 초목이 되어 움직였고 피아노는 그 외의 것이 되어 숲을 이루었다. 첼로 선율의 고저와 강약, 장단에 따라 나무들이 피어오르며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촘촘하게 때로는 필력이 거친 애니메이션처럼 변화무쌍하게 춤을 추었다. 나무들은 겹겹으로 끝이 없었고 그 사이로 또는 위 아래로 피아노가, 여러 바람과 공기와 갖가지 새와 곤충과 냄새 등이 되어 돌아다녔던 것이다. 둘은 어울려 숲을 만들어나갔고 나는 그 약동의 숲 한가운데를, 숲의 모든 움직임을 만끽하며 걸었다. 걷는 느낌이었다.


11. 지인들의 안부 전화와 병문안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내가 대외적으로 '워낙 밝고 상당히 긍정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 나, 정말 그런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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