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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4. 3. 09:59

09. 온이 "엄마, 나 선생님한테 칭찬젤리 받았어요."라며 보라색 젤리 하나를 원에게 보여주었단다. 원은 처음 받은 칭찬에 반색하며 어떤 일로 칭찬을 받았는지 물었단다. 온이 말하길, "나 오늘 처음으로 책을 폈거든요." 세상에. 지금껏 수업시간에 책도 안 펴고 혼자 뭔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말했다. "아빠의 부재 때문인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고만." 원이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아빠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아빠가 심어놓은 유전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딴짓에 열중하고 시키는 거 안 하고 혼자 잘 노는 유전자. 그러니 마음 무거워 마시길."  


08. 쉬는 시간. 노래를 들으며 휴게실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 풍경은 연두와 노랑과 분홍으로 물들어 가며,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루가 다르게 화사해지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Rachel Sermanni, Gregory Alan Isakov, Angus & Julia, Radical Face, Iron & Wine, Sibylle Baier. 요즘 틈날 때면 듣는 뮤지션들이다. 클래식과 재즈만 줄창 듣다 오랜만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사무치는 게 있어 좋다. 


06. 그들은 북아메리카를 누비던 거대한 무리였다. 그들이 이동할 때 3일 동안 밤낮으로 하늘이 검게 뒤덮였다는 설이 있을 만큼 번성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거리 여행에 최적화된 가슴 근육이 하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포획전문가들이 우후죽순 출몰했다. 때마침 통조림 기술이 개발되어 자본이 들러붙었다. 흑인 노예와 빈곤층, 건설 노동자에게 대량 공급되었다. 그들의 살은 통조림 깡통에 담겼고 깃털은 이불과 베개 속으로 들어갔으며 똥과 뼈는 사료와 약재로 쓰였다. 버릴 것이 없었다. '쓸모'가 그들의 커다란 불행이었다. 스포츠 사냥의 대상이 되어 수없이 스러져 가기도 했다. 잡혀 새장에 갇히기도 했는데 곧 죽었다. 먼 길을 여행하던 심장은 좁디좁은 감옥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자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1906년, 마지막 야생조가 총에 맞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 마리의 수컷과 한마리의 암컷이 동물원에서 사육되었으나 수컷들은 일찍 죽었고, 1914년 9월1일 오후 1시, 미국 초대 대통령의 부인 이름을 따 마사martha라 불리던 암컷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면서 그들은 완전히 멸종되었다. 생물학자들이 그들의 절멸에 애도를 표했다. 그들의 머리 부분과 등은 청회색이었고 가슴은 포도색, 배는 흰색이었다. 부리는 검고 다리는 붉었다. 이동 속도는 시속 약 96km였다. 그들의 이름은 여행비둘기passenger pigeon였다. 나그네비둘기라 불리기도 했다.


03. 휴일 아침, The Dave Brubeck Quartet의 앨범 「Time out」을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다.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베이스 리듬을 맞추며 창밖을 무심히 보고 있다. 낙엽이 쌓여있는 갈색 사면 조그만 숲 여기저기서 무언가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움직인다. 새들이다. 참새를 비롯해 조그만 새들이 먹이를 찾아 바쁘다. 총총 걷다 톹톹톹 뛰다 푸르륵 날곤 한다. 새들의 수다가 보기 좋다. 문득 생각한다. 때로 날개를 동경했었는데, 내게는 다리가 날개였던 것이로구나.


01. 대양 짙은 곳에서 가오고래는 유영을 멈추고 생각한다. 순간에 피고 지는 파도는 왜 물결마다 다른 역사를 가지고 왔다 사라지는가. 늘 삼키던 크릴새우들은 왜 오늘따라 수천의 서로 다른 면면으로 서글퍼 목에 걸리는가. 저 줄전갱이떼 줄전갱이들은 왜 오늘 한 마리 한 마리 개인사로 춤을 추는가. 종종 내 몸을 덥석 물곤 하는 백상아리의 허기를 왜 오늘따라 이해하려 하는가. 오! 심지어 인간의 야만까지도. 존재의 여력으로는 가늠키 힘든 격물의 수많은 경계들. 가야 할 곳과 맞서야 할 것의 모호한 지경. 그래서 고래는 눈물이 핑 돈다. 그 눈물, 조금은 알 것 같다. 막막한 행성에 뿌려져 그 들판을 걸어가는  한 숨 여행자의 촉이랄까. 구분되고 규정된 명사들 사이 사이에서 개별로 움직이는 방울방울 물방울들이 세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자의 감이랄까. 그래서 나도 눈물이 핑돈다. 허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좌표와 전선은 무상한 것이고 눈물은 바다에 번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래에게는 만만찮은 가오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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