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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4. 11. 10:52

20. 수술한지 6개월이 지났다. 때가 되어 장애등급 판정을 위한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진단서에는 '하지완전마비'라 적혀 있었고, 판정 근거인 근전도 검사 결과도 제로 제로 제로였다. 이 사실을 원에게 고하며 말했다. "1등급은 떼어놓은 당상이라는군. 계속 희망 가져도 되는 거야? 희망고문은 아닐까?" 원이 발랄하게 답했다. "나 천일기도 하고 있는 거 알죠? 그러니 최소 천 일 동안은 당근 희망을 가지셔야지. '천일의 야일'인 거지. 앤은 그 끝이 불행했지만 당신은 창대할 거예요." 까짓 희망, 그러지 뭐.


18. 까칠한 철학교사인 프레데리크 시프테는 "하루의 3분의 2를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는 니체의 명제를 꺼내들어, 노동에 자발적으로 매몰되어 오로지 일을 통해 삶을 조직하는 현대인들을 신노예라 규정한다. 또한 몽상이나 한가함, 성찰과 명상 등이 들어설 틈 없는 이 신노예들의 열정적이고 소비적이며 과시적인, 레저로 대표되는 여가활동을 비판한다. 그는 말한다. "(신)노예는 여가적 인간과 달리 스스로 '소외'될 수 없으며 그러기를 원치도 않는다"고. 그 이유는 "그들에겐 '모두와 마찬가지로'라는 표현 그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일하고 노는 것이 가장-절대적으로- 인간다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 대목을 읽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와 마찬가지인 일반에 속하려 마음 쓰지 말 것을. 결국 안 될 것을. 그 시간에 보다 더 소외에 집중할 것을.'


16. 벚꽃이 고요하게 지고 있다. 꽃잎들이 눈처럼 내린다.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낙  화 - 한 잎 한 잎, 눈물이다.


15. 돌단풍 민들레 벚 진달래 박태기 꽃다지 피나물 호제비꽃 냉이 꽃마리 조팝 흰제비꽃 산돌배 목련 올벚 문배 큰개별꽃 현호색 산벚 앵초 황새냉이 졸방제비꽃 댓잎현호색 자주목련 양지꽃 산수유 금낭화 별목련 괭이밥 콩제비꽃 동의나물....... 광릉수목원에 다녀왔다. 눈인사 나눈 꽃 핀 초목들이다. 뭐, 모두들 안녕하시다.


13. 사고가 나고 지금껏 수십 편의 꿈을 꾸었지만 악몽은 없었다. 추락하지 않았고 쫓기지 않았으며 갇히지도 않았다. 귀신이 나타난 적 없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없었다. 아! '이상한 나라의 삐삐'에 등장하는 대마왕을 닮은 자가 내 양 옆구리를 움켜쥐었고,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그를 총으로 쏜 적이 한 번 있기는 하다. 호러보다는 액션에 가까웠으니 악몽이라 말하긴 어렵다. 꿈들은 초현실공상비과학드라마 장르가 주류였다. 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하고 허무맹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여 꿈에서 상징을 밝혀내거나 예지를 간파하려 하지 않았다. 희망과 절망 따위를 읽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록 그런 비현실적인 꿈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두 주 전쯤, 휠체어를 탄 내가 처음으로 꿈에 출현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사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분명 입원한 환자의 신분인 내가 나타났던 것이다. 병원 운동장에서 의사들과 농구를 했는데, 휠체어에서 일어나 뛰어다녔고 이겼다. 병실에 가니 침대가 두껍고 넓은 집성목 탁자였다. 탁자가 높아 나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걸어 올라가니 탁자 위에는 각종 가재도구와 책과 노트, 이불 등이 한쪽에 두서없이 놓여 있었다. 깨어나 생각해보니 꿈 속의 나는 꿈 속에서 뛰어다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나를 신기하게 지켜봤던 것 같다.


12. 스피노자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이미지로 명료해진다. 신이 자신의 형상을 불어넣어 인간을 빚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모습을 본떠 신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것.


11. 개천길로 접어드니 굵고 드높았던 버드나무가 뎅강 뎅강 잘려 있었다. 반듯반듯 기괴했다. 무성하던 머리카락과 굵은 힘줄들은, 연두와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무는 검은 몸만 덩그라니 한숨처럼 서 있었다. 강아지 세 마리가 졸 졸 졸 길을 가고 있었다. 누렁이가 앞서고 콩순이가 따르고 순둥이가 뒤따랐다. 갑자기 콩순이가 누렁이를 한입에 꿀꺽 삼켰고, 누렁이 만해진 콩순이를 순둥이가 먹어치웠다. 순둥이는 부른 배를 질질 끌며 밭둑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곧이어 켁켁 케 겍 구토를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개울에서 오리 두 마리가 사랑을 하더니 새끼를 낳았다. 한 마리 퐁 두 마리 퐁. 세상에 나온 새끼들은 이내 물살에 떠내려가다 퐁 퐁 물거품이 되었다. 어미 아비는 아랑곳없이 다시 사랑을 했고 새끼들을 낳았고 새끼들은 물이 되어 흘러갔다. 다리 앞 삼거리 음식점 어연으로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사람들은 뒷문으로 무빙워커를 탄듯 걸어나오고 있었다. 대개 팔 한쪽이 없었다. 서씨도 지평댁도 전직 교감선생도 곱추할매도 그랬다. 개천을 벗어나 길 끝 작업실에 다다르니 애기똥풀이 집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문을 찾으려 낫으로 벴다. 애기똥풀들은 노란 즙을 울컥 울컥 토해냈다. 나도 땅도 노랗게 물들었다. 집은, 없었다. 세상은 허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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