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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3. 23. 10:47

30. 바스락 바스락 창밖의 청서가 슬펐다. 언덕에 휘청청 서서 피는 진달래가 슬펐다. 아침 체조의 활기가 슬펐고 행복줍기는 더 슬펐다. 칫솔질이 슬펐고 삐죽 튀어나온 뒤머리카락 죽이기도 슬펐다. 전기에 반응하는 허벅지가 슬펐다. 바람이 슬펐고 왕벚나무 꽃망울이 슬펐다. 언덕을 산책하는 노인들이 슬펐다. 레디칼 페이스가 슬펐고 성재활실 탁자가 슬펐다. 집 짓는 까치와 부리에 물린 나무가지가 슬펐다. 거진 할머니의 사투리 수다가 슬펐고 여의사의 갈색 눈동자가 슬펐으며 딱히 적을 통증이 없는 내 몸이 슬펐다. 좌약이 슬펐고 샤워실의 온수가 슬펐다. 조롱받는 체어시팅 밸런스가 슬펐으며 어깨가 경직된 거울이 슬펐다. 눈 큰 치료사가 슬펐다. 슬프게 밥을 씹고 슬프게 유황을 삼켰다는 게 슬펐다. 삼십 오 알피엠으로 쳇바퀴를 도는 전자동 자전거가 슬펐다. 항생제가 슬펐고 하지치료를 친절하게 비웃는 친절한 한의사가 슬펐다. 그레고리 알란 이자코프가 슬펐다. 두 건의 안부 전화와 한 건의 그림엽서가 슬펐다. 권군의 검은 가방에 달려있는 세월호 노란뱃지가 슬펐다. 내 몸에 맞춰주는 휠체어 컨퍼런스가 슬펐고 흉추 십 번 영업사원의 보라색 아이쉐도우가 슬펐다. 잡혀 올라오는 돌문어가 슬펐고 슬픈 돌문어로 요리된 각종 음식들이 슬펐다. 선거 독려에 슬펐고 그 슬플 결과에 슬펐다. 하지관절운동과 팔굽혀펴기 삼십 회 세 세트가  세트로 슬펐다. 전공의가 파릇해 슬펐고  꿩이 나타났다 슬프게도 사라져 슬펐다. 바지를 벗다 벗다 못 벗어 하- 젠장 슬펐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삼 번이 슬펐다. 원의 목소리도 온의 문자 이모티콘 폭탄도 슬펐다. 아침부터 밤까지 사사건건 조목조목 하나하나 슬펐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슬픔에 겨워 허기지는 날도 있는 거지. 더구나 삼월의 마지막 날 이브라 슬픔과 어울리지 않은가라고 말하다 끝내 슬펐다.


28. 그제 온이 이랬단다. "엄마, 나 2016년 3월 26일 저녁 7시 17분 44초에 딱 변할 거다." 오늘 원과 통화하다 물었다. "참 참, 온이 어떻게 딱 변했어? 7시 17분 44초에." 원이 대답 대신 온을 바꿔주었다. 온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아버지? 잠시 멍하다 곧 카카카 웃고는 그게 딱 변한 거냐고 물었다. 온 왈 "이제부터 완벽한 존대말을 쓰기로 했어요. 아버지." 어허 낯선지고. 이 맹랑하고 깜찍한 목소리로 아버지라 부르다니.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겠다는데 그건 안될 말이라고, 아빠라 불러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어허 적응 안 되는지고.


25. 오른쪽 어깨의 통증을 호소했더니 담당 전공의가 초음파실로 불러들였다. 기계 앞에 앉아 단추 두 개를 풀고 어깨를 드러냈다. 전공의는 곧바로 젤을 바르고 탐색을 시작했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흑백의 어깨는 드넓은, 돌과 열기가 널려있는 황무지 같았다. 또는 yashoul6627 쯤으로 불려도 어울릴 법한 소행성의 거칠고 어두운 지표면 같기도 했다. 전공의가 스틱을 움직여 살필 때는 전지적 작가시점이 낮은 언덕에서 황량하고 막막한 주변 풍광을 둘러보는, 그런 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피부 속에 펼쳐진 끝없고 거친 들판이라니. 누군가, 무엇인가 혹 저 곳을 헤매며 걷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세상을 걷고 있듯이. 


23. 창 너머 점 점 점 노란 망울, 산수유 점 점 점 꽃 너머,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점 점 점 수 천 꽃망울 사이에서, 서성이며 연기를 날리고 있다. 여자가 만일 총 총 총 뛰어다닌다면, 산수유 가지들 사이를 총 총 총 건너다니는 하얀 새처럼 보일 것 같다. 깃털마다 봄볕을 달고 나른하게 퐁 퐁 퐁, 담배 피우는 새. 누군가 여자를 부르고 여자는 담배를 발로 부벼 끄고는 포르르 날아간다. 산수유 점 점 점 나무는 미동도 없다.


22. 수유리로 온 후  짬이 나면 4층 복도 끝, 남서쪽으로 난 창문 아래 앉아 오전에는 도봉산에 깃드는 볕을, 오후에는 실내로 들어와 내 몸을 비추는 볕을 즐기고 있다. 오늘 오후에는 창가에 앉아 문학소년처럼 다소곳이 스피노자를 읽기도 했다. 이 병원에 머무는 동안 이 창가, 아마도 사소한 아지트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와서 무르익고 완연해지다 훅- 가는 봄을 간간이 내다보며 앉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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