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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5. 1. 20:05


09. 아이 운동회 날. 원이 간간이 문자로 중계를 해주었다. 작은 학교라 전교생이 출동했는대도 아기자기 하고, 내용도 알찬 것이 볼만하다 했다. 시큰둥하던 아이도 생각했던 것 보다 재미있다며 나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아빠 달리기' 시간에는 원을 찾아와 엄마가 달리면 안되냐며 조르기도 했다고.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다. 저녁 먹고 운동 한 판 하고 원과 통화 하다 아이를 바꿔달라 했다. 이야기 끝에, 아빠가 달리기에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아이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라고 말하고는 읽던 책을 계속 읽고 싶은데,라며 말 끝을 흐렸다. 잘 자라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왠지 허기가 졌다.


08. 한 달 보름 동안 가운데 자리에서 끼어 지내다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떡갈나무와 일 미터 쯤 더 가까와졌다. 기껏 일 미터지만 거치는 것 없이 창문 가득 마주하니 나무와 훨씬 친해진 것 같다. 바람이 많다.


05. 가지, 호박, 토마토, 오이, 고추, 야콘 등의 모종을 심으려 오늘 모두 원소리에 모였단다. 원과 온도 시외버스를 타고 가고 있다고 했다. 바삐들 움직였을 낮이 어느새 다 지나고 이제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 일을 마친 식구글은 아마도 산딸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을 것이다. 내 부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려나? 하더라도 갓 심은 모종 한 잎의 무게만큼 가벼웠으면 좋겠다. 모두들 수고하셨다.


02. 저녁을 먹고 창가에서 쉰다. 마침 창문이 열려 있다. 바람이 살금살금 들어온다. 시원하다. 날이 어둑해지며 나무는 검어지고 연두와 초록 잎은 짙어져 풍경이 그늘처럼 깊다. 어디선가 토 돋 도 톹 작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오는 여행자 같은 소리들. 점점이 많아지고 점점이 가까와지더니 이내 풍경에 가득 찬다. 그렇게 비가 온다. 벚 잎과 떡갈 잎들이 쉼 없이 끄덕인다. 아, 좋다. 


01. 히읗씨가 미학자와 평론가랑 이야기를 나누다 내 염려를 했단다. 그랬더니 그니들이 히읗씨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당신이 그런 염려를 하는 건 예술가란 존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예술가란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며 예술가로서도 더 커지고 강해지고 깊어진다'고. 읽으며 생각했다. 예술가로서 고난을 통해 더 강해지고 깊어지려면 고난 전에 내가 예술가였어야 하는데, 과연 예술가였던가? 너그럽게 봐준다해도 예술가는, 아니었다. 예술가를 기본적으로 직업 중 하나라 여기는데 내가 예술에 투여한 시간이나 노동 강도를 볼 때 직업이라 말하기에는 새발의 피였다. 더구나 예술이란 것에 한 발만 담그고 폼 잡으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삶을 간보는 태도로 일관한 자를 어찌 예술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예술가로서 고난을 겪으며 더 깊어진다'는 말은 내겐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고난과 깊이에 대한 그니들의 말을 지금의 나에게 빗대어, 그래도 굳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나? '머뭇거리던 자, 고난을 건너며 커지고 강해지고 깊어지면 진정 예술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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