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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5. 22. 15:50

31. 새벽에, 비 내리는 적막한 마을의 밤을 걸었다. 물웅덩이를 만나면 훌쩍 건너 뛰기도 했다. 뜬금없이 인사동길을 서성이기도 했으며, 다양한 색의 기괴한 식물들이 우후죽순 춤추는 숲길을 걷기도 했다. 녹음 짙은 숲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열매는 주홍으로 선명했다. 

기능적 전기 자극 치료를 받으며 같은 처지의 김형에게, 꿈속에서 하도 걸어 다녔더니 아침부터 피곤하다 했다. 김형이 웃으며 말했다. "왜 깨어나셨소. 그 생에서 사시지." 순간 두서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이 삶도 꿈일까? 깨어나면 또다른 삶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어떻게 깨어날까? 깨어날 수 있을까? 깨어난다는 것은 깨친다는 것? 꿈에서 깬다는 건 지금를 깨친다는 것? 하여 또다른 삶이란 이 생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맞서 변화하는 것? 그것이 또다른 삶으로, 다른 우주로 건너가는 것? 그렇게 깨어나는 것? 


26. 뒤척이다 창 너머 고요한 숲으로 팔을 뻗어본다. 닿을 길 없지, 어두운 허공을 쥔다. 허공이 거칠고 작고 따뜻하다. 만지작거린다. 아! 할머니. 이건 할머니, 손이다. 만져본 적 없는, 멀리 이목구비의 그늘로 새겨진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자손을 의해 심청처럼 삶을 끄신 할머니. 매만진다. 허공을. 아니 할머니 손을. 그리고 묻는다. 할머니, 저 괜찮은 거죠? 이렇게 잠시 허우적거려도 이생에 잘 있는 거죠? 언듯 부는 바람이 숲을 흔든다. 숲이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귀 기울이니 바람이 숨비 같이 휘파람 같이 잎들을 어루만지며 간다.


24. 카렌 암스트롱의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를 일독했다. 두어 번 더 곰곰이 읽어야 감이 잡힐 것 같고, 읽을 때마다 새로울 것 같다. 책은 붓다의 삶과 관련된 전설이 기록되어 있는 기원전의 운문집  <숫다-니파타>의 한 구절을 읊으며 끝을 맺는다.

"바람에 꺼진 불이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듯이, 깨달음을 얻어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형상들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 말의 힘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


22. tvn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본다. 유럽 어느 마을에서 연하가 웹을 통해 완에게 말한다. '내 다리가 그립다. 그걸, 그 그리움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서 네게 말한다. 그 그리움을 네게 말할 수 없다면 더이상 말해 무엇하랴.' 이 친구, 다리를 못 쓰게 된 걸까? 아니나 다를까. 연하의 얼굴을 담던 카메라가 조용히 가슴으로 내려오더니 커밍아웃을 하듯 휠체어를 비춘다. 노트북을 닫은 연하는 휠체어를 천천이 몰아 창가로 가 멀리 이국의 바다를 본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생각한다. 다리에 대한 그리움 - 전혀 알 수 없었을 그 그리움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해의 지평이 한 뼘 넓어진 건가?


21. 술집은 모래에 꽂혀 있었다. 끈질기게 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노을을 등에 지고 찾아왔다. 그들은 신발의 모래를 털어내는 일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술값은 묵언이었다. 말이 없는, 말 외의 소리들을 들었다. 자정이 되면 하나 둘 모두 깊은 밤을 안고 돌아갔다. 그제야 나타난 주인은 모래를 쓸어담았다. 차마 하지 못하고 버린 말들도 담아 문 밖에, 망루처럼 쌓았다. 새벽이 되면 바람이 불었고 망루는 무너져 무덤처럼 가라앉았다. 가만히 앉아 모래를 지켜보던 주인은 술집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 세상도 덜컥 꺼졌다. 백만년 쯤 계속 되어 온, 그러나 한 번도 똑같은 모래가 등장한 적은 없었던, 그런 의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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