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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6. 13. 10:55

20. 일찍 짐을 싸놓고 하늘정원에 나와 앉아 있다. 참새에 까치에 갖가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맞고 있다. 아직 아침인지라 바람이 매끈하고 선선하니 좋다. 멀리 마을 뒷산의 푸른 숲 한 구석 한 줌이 분홍으로 밝다. 저것은 아마도, 분홍에서 주홍을 거쳐 빨강까지 넘나드는 수십 수백 수천의 수술을 안테나처럼 허공으로 뻗는 자귀나무꽃들이렸다. 내가 양평에 있었다면 분명 한 번쯤은 신애리 언덕의 자귀나무 아래에서 꽃들을 우러렀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여튼, 도봉산이 있는 이 풍경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두 시간 후면 재활난민의 세째 번 경유지인 녹색병원으로 떠난다. 안녕, 다시는 오지 않을 수유리의 순간들이여, 작은 우주여. 잘 머물다 간다. 모두들 건강하시라. 


16. 치료실 대기 공간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뻑뻑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말끔한 치료실 바닥에 무리를 잃고 길을 잃은 개미 한 마리가 어쩔줄 모르며 방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삐 몸을 놀렸으나, 공황상태에 빠진 채 바닥재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개미 곁으로는 휠체어 바퀴와 워커 다리, 지팡이와 여러 사람의 발이 수없이 지나다녔다. 곧 치료사가 나를 불러 개미를 등지고 가 매트에 누웠다. 운동을 하며 개미의 운명을 염려하고 있는데 김창완의 노래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삶을 헤맬 때 벌레를 나라 여기고 곧잘 들었던 노래,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 오랜만에 속으로 불러보았다. '비닐장판 위에 딱정벌레 어디로 가는지 알까 아마 모를 거야. 먹이 찾아 제 짝 찾아 제 발걸음도 잊은 채 평생 헤맬 거야. 그리고 죽어 흔적도 없이 슬퍼하지 않으면서. 야- 딱정벌레 한 마리 기어가네.'    


13. 몇 달만에 페북에 인사동 나들이 사진 한 컷과 짧은 글을 올려 현재 내 상태를 알렸다. 많은 이들이 '좋아'해주었고 십수 명이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었다. 고마운 댓글에 일일이 갈매기 팍팍 날리며 맑고 밝은 답글을 달고났더니 왠지 좀 지쳤다. 아! 우울하다 말할 수 없는 공개적이고 가벼운 긍정은 피곤해.ㅎ


12. 티브이에 등장하는 고즈넉한 설산을 보다 불현듯 아르놀트 뵈클린의 '망자의 섬 Isle of the dead'이 떠올랐다. 화집을 통해 처음 보았을 때 죽음이라는 비장함보다 피안과도 같은 적요에 매혹되었던, 하여 내 마음 속의 '어떤 곳'이라 여기고 이상한 동질감까지 느끼게 했던 그 그림을 원화로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더 나아가 아예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과 함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실재하고 싶어졌다. 아주 고요하게.

* 이 그림에 '죽음'이라는 낱말이 붙은 건 극적 효과를 노린 화상의 아이디어. 뵈클린 자신은 '고요한 곳'이라 이름붙였다 한다. '망자의 섬'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1880년에 처음으로 그린 그림에 '고요'가 가장 깊게 깃들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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