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1

노트 2016. 7. 4. 14:31

08. 지읒이 말했다. "어릴 적 어느 여름날이었어. 며칠간 하늘에는 내내 먹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어느 날 잠시 그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 한 줄기가 지상으로 드리워졌어. 냇가 둑길에서 혼자 걸을 때였던가. 그 광경을 보는데 어린 마음에도 꽤나 울컥하고 눈물겨웠더랬어. 물론 심중의 그 정체를 알리는 없었지. 다 큰 뒤에도 마음이 어디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곤고한 날이면 그때의 장면이 기억 저편에서 가마득히 떠올라."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내가 말했다. "나도 어릴 적 생각이 나네. 비슷한 경험이었다 할만한데, 대략 열다섯 쯤이었을 거야.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뒤였던 것 같아. 조금 불은 냇물이 빠르게 흘러가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보고 있었는데, 순간 뭔가 서글프고 허기지면서 뭉클한 어떤 것이 마음에 차올라 가만히 서서 울었더랬어. 성인이 되어서도 간혹 그랬지. 그때마다 '심중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는 않고 늘 그 감정에 취하다 말곤 했어. 근데 지금 네 얘길 듣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음....... 네 정조와는 다르겠지만 음....... 밝고 빛나는 순간을 통해 우리는, 만물이 무상하여 변하고 쇠락하고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며 관계 맺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고, 나 또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먹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한 줄기 햇살도, 물을 비추며 반짝이는 햇빛도 그와 같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그때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거다. 모두 다 사라지고 마는 세상의 허무를. '무'에서 태어난 세상이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 속성이 허무라는 것을. 그래서 눈물겨웠던 거고 그래서 가만히 울었던 거다. 알랭이 말한 것처럼 설계도에서 폐허를 보았던 거다. 근데 여기서 말하는 '무'는 '없음'이 아니라 '알 수 없음'이다. 세상이 생겨난 이유를 도저히 인간의 사유와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 너머를 '없다'고 한 거다. 세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남겨둔 물음인 거다. 그러니 만연한 '허무' 또한 '알 수 없음'에 대한 긍정인 거다.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르게 알고 있었던 거다. 하여 허무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모든 것들과 함께 하며 그 중심에 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과 관심,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함에 눈물겨웠던 거다. 뭐, 이런, 비약이 있고 두서는 없는 생각." 


04. 모르는 사이에 왼발 엄지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붓고 진물이 났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그 원인도 상태도 경중도 알 수 없구나. 삶의 고통도 그러하겠지. 모른 체 또는 모른 채 느끼지 못하면 웃으며 썩어가는 것이겠지. 주치의에게 발가락을 보여주니 처방을 내주어 외과로 갔다. 상처를 살펴본 의사는 발톱을 잘라내야겠다고 말했다. 소독을 하고 마취를 하고 가위로 파고든 발톱 부분을 오려내는 동안 발은 마치 물 밖으로 나온 굵은 물고기처럼 힘차게 파닥이며 고통과 맞섰다. 간호사와 내가 종아리와 무릎을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며 치료를 마치자 발은 그제야 안도하듯 잠잠해졌다. 아파 어쩔 줄 모르는 발이 한없이 안쓰러웠다. 같이 아파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속으로 엉엉 울었다.


02. 아내가 낮잠을 자고 있다. 청록의 체크무늬 이불을 뒤집어 쓰고, 휠체어 너머에서 고단을 풀고 있다. 한 숨을 멈추고 세상을 떠나려 하다, 아니지 아니지, 돌아온 아내가 색색 잠들어 있다. 그는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중인가? 더 머물기로 한 이 생에서 그는 삶을 끝낼 수 있을까? 이불 밖으로 아내의 팔이 툭- 튀어나온다.


01. 먹구름이 무겁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일과를 마치고 1층 현관으로 비구경을 나섰다. 처마 밑으로 나가 순하고 다소곳한 자세로 퍼붓는 비를 바라보았다. 주차장에 고인 비 위로 쉼 없이 굵은 비가 떨어져 박히고 파문들이 따끔 따끔 명멸했다. 우산을 접고 피며 사람들이 끊임 없이 정문을 들락거렸고, 왼쪽 응급실 입구에서는 소리지르며 온 구급차가 경광등을 반짝이고 있었다. 붉고 푸른 그 불빛은 심장을 뛰게 했다. 오른쪽으로는 후줄근하고 딱딱한 장례식장 입구가 지하로 뻗어 있었다. 검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바삐 그 속으로 들어가고 간혹 조화 장식이 뒤를 따르기도 했다. 비와 함께 어두워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윤회를 왜 사슬이라 하는지, 그 반복의 얽매인 구조에서 왜 빠져나오려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왜 더이상의 생을 마다하는지. 비가 거세지고 바람도 더해져 보라를 만든다. 문득 담배가 피고 싶다. 연기를 날리고 싶다. 이 풍경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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