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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7. 12. 21:43

18. 아이 담임 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원과 통화했다. 원이 전하는 아이의 상황들을 듣다보니, 다친 후로 가장 슬프고 아픈 날이 되었다. 저녁 운동도 접고 모로 누워 우는 동안 밤이 되어버렸다. 그 맑고 아름다운 아이가 아빠의 부재로 인해 상실과 결핍을 겪으며 우울해 하고, 그 감정과 욕구불만을 공격성으로 드러내고 있었다니.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니. 내가 이 아이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14. 어제의 생각에 덧붙여서. 내가 a와 b로 헤어져서 각자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때, a를 선택해 '새로운 우주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내'가 다치지 않고 '변함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의 우주인 b를 언듯 들여다 보았더니, 그 세상의 그가, 그러니까 내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여전히 서성이며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그, 나. 자신과 만나지 못한 채 스스로 짝사랑하며 자기 옆에 서 있을 뿐인 그, 나. 상처와 고통을 부인하며 헤 헷- 웃음으로 방어하고 무마하며 변하지 않는 습관의 생각에 갇힌 그, 내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럼 b를 관찰하고 있는 a의 나는? 아직 다를 바 없지만 알아가려 조금씩 애쓰고 있다는 거. 무엇을? 내 '마음'을.


13. 다중우주를 논할 때 종종 등장하는 레파토리가 있다. '나'와 같은 존재가 또다른 우주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에피소드가 그것. 적어도 9차원 이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이루어진 수학적 계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나'가 a와 b라는 결정적 갈림길에서 a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a와 b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지만 스스로 택한 a를 인식하며 그 우주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순간적 공간 이동이 가능한 양자의 특성에서 유추한 가설이다. 이런 공상과학적 논리에 빗대어 생각해 보기를, 지난 가을 윤밴의 '나비'를 들으며 떨어지던 그 아득한 순간에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긴 터널을 통과해 다른 우주로 옮겨 온 거다. 하여 다치지 않았다면 전혀 경험하지 않았을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일들을 이 새롭고 낯선 우주에서 몸소 겪어나가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 우주는 끊임 없이 변화하며 나와 함께 숨 쉴 것이고, 구체적인 경험과 직접적인 지식을 통해 넓어지고 깊어지고 세밀해질 것이다. 이곳은, 싫든 좋든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내가 선택해 찾아 온 우주이기 때문이다.


12. 동생이 뽀얀 막걸리가 담긴 제수 잔을 찍어 보내며 덧붙였다. '형 몫까지 함께 절을 드렸으니 음복하소.' 할머니의 쉰 번째 기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 나이와 같다. 두 노인이 차리고 둘째 아들이 부랴부랴 달려가 함께 했다. 제사 시간에 맞춰 병상에 앉아 나도 할머니께 절을 드렸다. 죄송하다 하지 않았다. 후회도 하지 않았고 다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평안만을 기원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다. "괜찮다. 아가야.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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