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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8. 2. 19:30
10. 이른 아침마다 호흡을 한다. 수없는 잡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릴없는 기억들이 바삐 들고 난다. 평온하기 참 어렵다. 무념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경지인가?  오늘도 마찬가지. 깜빡 전구처럼 두서 없이 명멸하는 생각들. 개중 하나. 신대철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십대 말에 폼으로 읽던. 그 표지와 제목만 맴맴 돈다. 항복하고 시를 찾아본다.
'바닷물이 스르르 흘러 들어와 / 나를 몇 개의 섬으로 만든다 / 가라앉혀라 / 내게 와 죄짓지 않고 마을을 이룬 자들도 / 이유 없이 뿔뿔이 떠나가거든 / 시커먼 삼각파도를 치고 / 수평선 하나 걸리지 않게 흘러가거라 / 흘러가거라 / 모든 섬에서 / 막배가 끊어진다' - 신대철「무인도를 위하여」1977

09. 나와 비슷한 처지라 여기고 속으로 응원을 보냈던, 한 달이 다 되도록 휠체어에 실려 맥 없이 오고 가던 중년이 오늘 대뜸 일어나 한 발 한 발 딛는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꿈틀 - 하는 이 배신감과 허탈함은 도대체 뭐니? ㅎ;;;

07. 사막을 걸어. 메마른 흙으로 뜨거운. 바삭하고 공활한. 뼈를 숨기고 있는 사막을. 삽을 들고 물을 지고. 걷다 흙을 파고 걷다 흙을 파고. 뼈를 찾아. 누구는 아버지의 뼈를 누구는 엄마의 뼈를 누구는 형제의 뼈를 나는 오빠의 뼈를. 힘줄과 신경과 살은 다 사라진. 그들이 죽이고 묻은. 별 같이 많고 별처럼 빛나던 이들의. 뼈를 찾아. 몇 십 년 동안. 그들의 정부가 바뀌고 바뀌고 바뀌는 동안. 그들이 감추고 지우는 동안. 그들의 나라가 잊는 동안. 걷다 흙을 파고 걷다 흙을 파. 뼈를 찾은 이들은 품고 돌아가 다시는 이 사막에 오지 않아. 이 사막의 칼칼한 바람을 맞지 않아. 나는 오늘도 걸어. 흙먼지와 아지랑이를 삼켜. 먼지와 열기는 폐에 쌓여 무거워. 한낮을 돌다 별이 뜨기 전에 돌아가. 늦으면 사막의 어둠에 갇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워. 어둠은 비밀을 만들고 비밀은 죽음과 손을 잡으니까. 몇 십 년 동안 그랬어. 그런데 오늘. 어둠에 있기로 했어. 별에게 묻기로 했어. 뼈는 어디 있느냐고. 짐승이 오든 말든 귀신이 오든 말든 그들이 오든 말든 비밀이 오든 말든. 사막은 검어지고 별이 하나 둘 점점이 다닥다닥 생겨 나. 허공에 가득 차. 아! 별. 빛들. 황홀해. 뼈도 저렇게 아름다울 거야. 뼈는 별에서 온 거니까. 혹 별이 뼈를 비출까. 사막을 둘러 봐. 별빛은 너무 멀리서 와 흙의 두께를 이기지 못하나 봐. 사막은 다만 검을 뿐. 그러다 생각해. 저 별빛들은 몇 십만 년 전 몇 백만 년 전 수십억 년 전 몇 천만 년 전의 것.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빛. 지구도 사피엔스도 어쩌면 태양도 없었던 때. 전에 전부터 오던. 저 천문학적 과거에는 귀기울이고 탐험하고 열광하면서 왜. 겨우 몇 십 년 전. 겨우 몇 해 전에 죽은. 별빛에 비하면 찰나인. 그래서 지금인 죽음은 잊으라 하는지. 지나서 가버린 일이 아닌데. 하나 하나 별을 빛내는 우주였던 죽음을. 왜 지겹다 하는지. 지금인 죽음을. 별들에게 위로를 받아. 어마어마한 그 빛의 과거에게. 비하면 나는 지금 여기. 순간을 살고 있는 거니까. 찾을 때까지 찾을 거야. 찾을 때까지 지금이니까. 살아서 품고 묻고. 증오하지 않고 죽는 거. 그게 뼈를 찾는 이유야. 사막을 걷는 이유. 뼈를 찾으면 그때부터. 그제서야 잊기 시작할 거야. 아주 천천히. 오백만 년 동안. 별빛만큼 오래. 그만큼 빛나면서. - 파뜨리시오 구즈만의 다큐멘터리 영화 'Nostalgie de la lumiere'를 보고.

04. 원이 전화했다. "아들이 엄마 환심을 사려고 이렇게 노래를 부르셨네요. 엊그제 어린이집 캠프에서 듣고는 유튜브에서 찾아 외운 김세환의 비둘기집에 내 이름을 넣어 부르며 알랑방귀를 뀌네. 잘 들어봐요. 온- 준비됐어?" 아이가 전화를 받아 또랑또랑 노래를 불렀다. "김은영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김은영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김은영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김은영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김은영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김은영 사랑 엮어 갈 그런 집을 지어요." ㅎ

03. 치읓과 티긑이 찾아왔다. 둘은 나를 번쩍 들고 계단 세 칸을 날아 주점에 들어섰다. 골뱅이탕을 주문했다. 국물이 칼칼했다. 치읓은 소주를 티긑은 소맥을 나는 맥주를 마셨다. 티긑이 웹툰에 연재할 만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다 뜬금없이 치읓의 얼굴을 보며 뉴질랜드를 호명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치읓이 입을 열었다. "거기가 어떻게 생겼냐면 호리병의 가는 목 부분이랄까? 그네들 말대로 가오리의 꼬리가 시작되는 곳이랄까? 아무튼 넓었던 땅이 거기서 한껏 좁아지거든. 그래서 좌우로 어디든 바다가 가까워. 아내는 거길 좋아했고 거기서 살았고 거기서 슬그머니 죽어갔어. 바다가 매일 조금씩 아내를 데려갔는지, 가서 보니 엄청 말랐더라고. 마지막 한 달을 겨우 함께 했는데, 담요에 화석처럼 담겨서 병원 창가에 앉아 있곤 했던 아내는 그 바다를 그리워했지. 아내가 죽고 그 바다를 매일 매일 돌아다녔어. 함께 갔던 곳도 낯선 곳도. 불법체류자가 되기 직전까지.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때였네." 눈이 살짝 붉어진 치읓은 숱 없는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난 가을 초입에 아내를 보낸 치읓이 그 섬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만나서 술을 나누며 하겠노라던 위로를 미루고 미루다 내가 다쳤고, 결국 그때 그의 아픔을 영영 나누지 못한 채 지금 내가 위로를 받고 있다. 위로는 미룰 일이 아니었던 거다. 아픔이, 아픔도 항상 거기 그렇게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니까.

02.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거시적인 세계도 존재하고 세포의 세계도 존재한다. 원자와 핵의 세계도 존재한다. 이 세계들은 각자 모두 다른 세계다. 그 세계들은 나름의 언어와 수학체계를 가지고 있다. 더 작은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서로를 보충해준다. 왜냐하면 나는 원자이기도 하고 세포이기도 하며 눈으로 보이는 생리학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단지 다른 단계의 진실일 뿐이다.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이다.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 여러분과 나는 글자 그대로 '하나'이다.」- 다큐멘터리 'What the bleep do we know-Down the rabbit hole' 중에서.

01. 입대하기 며칠 전,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속리산을 오르기로 하고 기차를 타고 청주로 향하고 있었다. 입석이었다. 별 말 없이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추운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렁이에게 사후가 없다면 사람 또한 그렇다. 송충이에게 영혼이 없다면 사람 또한 그렇다. 귀뚜라미에게 천국이 없다면 사람 또한 다르지 않다. 사람은 지렁이보다 귀뚜라미보다 우월하지 않다. 살아가는 방법과 전략이 다를 뿐 평등하다. 사람의 의식과 언어도 그런 방편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이 송충이보다 나은 삶의 근거일 수는 없다. 낫고 모자라고 우월하고 월등한 건 애초에 없다. 태어났으니 살다 죽는 건 마찬가지. 죽으면 절멸인 것도 마찬가지. 완벽한 단절이 있을 뿐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고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 그 순간에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골격이 되었고, 이후로 유물론이 더해져 견고해졌다.
그런데 다치고 난 후, 그러니까 다치는 순간 건너 온 새로운 우주와 지내면서 세상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의식과 인식, 영과 혼, 참나와 무아, 에너지, 신비, 마음과 생각, 원자와 소립자, 얽힘과 중첩, 선택, 공과 무, 관찰자와 주관 등의 비물질적인 것들에 끌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스스로 완고하고 결론적으로 세팅된, 정해진 불변의 법칙에 따라 객관적으로 움직이는 물질세계에 뚝 떨어져 그 안에서 찰나를 견디며 살다 완전히 사라지는 게 과연 생과 멸의 전부일까? 우주가 나를 낳은 게 아니라 나의 의식이 우주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우주가 진정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실재일까? 몸이라는 물질이 원소로 분해되어도 의식이란 것은 가령 혼이나 에너지 등의 측량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반야심경에서 설하듯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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