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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7. 21. 11:25

31. 휴일 점심. 긴 오이고추를 뚝 자르는 순간. 원소리 앞산 초입에 피어 흔들거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들반들 미나리아재비 노란 꽃이 보고 싶어 군침이 돌았다.


28. 한낮, 원이 전화했다. "여기는 방방. 아드님 두 시간째 방방 뛰고 계시네요. 점심 먹으러 가쟀더니 더 놀겠다며 참치 김밥 세 줄 사오라네. 아! 왜 전화했냐면 아침에 온이 깨서 꿈 얘길 하더라고. '엄마, 꿈에서 어떤 언덕에 올라 갔는데 거기가 놀이공원이더라. 매점도 있고. 썰매를 탔는데 엄마랑 아빠도 같이 있었어. 근데 아빠가 멀쩡하더라. 배가 좀 쏙 들어가기는 했지만 걸어 다녔어. 아빠가 꿈처럼 걸었으면 좋겠다. 그지, 엄마?' 이러더라고. 더운데 애쓰시길. 난 김밥 사러 가요."


27.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우리 안의 세계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그 반대다. 즉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외부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우리는 물질이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없다. 우주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다. 원자를 살펴보자. 우리는 원자를 딱딱한 공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자는 중앙에 밀도가 높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작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주위에는 전자가 무작위의 가능성으로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 아니다. 밀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원자핵 역시 전자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물질들에 비해 가장 견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은 구체화된 정보 조각과 같은 것이고,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이다........우리는 주위의 사물이 내가 입력하거나 선택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 생각을 없애야 한다. 대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의자나 탁자, 이 방과 카페트 그리고 카메라까지 이 모든 물질세계가 단지 의식의 가능한 흐름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흐름에서 순간 순간 선택을 해서 나의 실질적 경험이 구체화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생각이다. 정말 중요하지만 어렵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경험과는 별개로 세계가 우리 외부에 이미 존재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양자물리학은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양자물리학의 공동발견자인 하이젠베르그 자신도 원자는 물질이 아니라 단지 경향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물을 사물이라 생각하는 대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사물들은 모두 의식의 가능한 형태들이다.」 다큐멘터리 'What the bleep do we know-Down the rabbit hole' 중에서.


26. 실려 간다. 꽃순이. 파란 트럭을 타고 열한 살 꽃순이. 자기만한 집과 함께. 개줄과 함께. 바람을 맞으며 하품과 함께. 쫑긋한 귀와 함께. 터널을 지나 개울을 건너 언덕을 넘어. 덜컹거리며 젖은 눈꼽과 함께. 실려 간다 꽃순이. 어디로 가는지 어찌 죽을지 모르면서. 열한 살 꽃순이. 흰털을 날리면서. 다리를 핥으면서.


24. 거리의 밤은 밝고 소란스러웠다. 저 산 위에 저 소나무 너머로 팡팡 불꽃이 터졌고 각양각색의 네온을 반짝이며 마차들이 줄지어 갔다. 가면을 쓴 이들이 환호하며 그 뒤를 따랐고 여기 저기서 개들이 짖었다. 거리는 오래된 자유를 공식적으로 기념하고 있었다. 형식을 갖추느라 예술가들도 참여했는데 개중 세계적인 작가 엘라스 모디어프도 있었다. 그의 부스에 들어섰다. 침침하고 고약한 방에서 꽁초담배를 팔고 있었다. 꽁초에는 자유와 관련된, '희생' 따위의 고귀한 개념들이 새겨 있었다. '책임' 하나를 샀다. 고가였다. 한 번에 깊이 빨아 심장에 넣었다가 길게 뱉았다. 자유는, 책임은 가슴에 뻐근한 상처를 남기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뒤이어 거리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네온의 마차들이, 개소리들이, 가면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부스도 엘라스도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은 적막한 들판이 되었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홀로그램처럼 생과 멸을 반복하며 서 있었다. 사방 지평선 위로 허공이, 오직 검고 깊었다.


23. 토요일 오후, 휠체어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옆 칸 아저씨의 네 살 손녀가 할아버지와 놀다 내 앞으로 와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할아버지다. 여긴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많아." 헉! 아무리 머리카락 희끗희끗하고 전형적인 뿔테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어도 그렇지. '아버님'에 익숙해진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라니. ㅜㅜ


22. 십여년 전에 제작된 갈라파고스 제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다. 바위 위를 푸른발부비새 한 마리가 깡총거린다. 생각한다. 지금쯤은 아마도 죽었을 저 새, 푸른 발을 가진 저 새를 나는 지금 전파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서 만나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지껏 내 의식에 존재한 적 없었던 저 새와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 연관되어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전 같았으면 '무슨 새똥 같은 소릴. 절대. 네버!'였을 것이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니, 막연하고 오리무중이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갸우뚱거린다.


21. 「사과와 밀반죽으로 만들어진 애플파이. 애플파이를 씹어 먹었다. 접시 위에 있던 애플파이가 사라졌다. 137억년 전 대폭발로 우주 탄생. 38만년 이후 우주 팽창과 온도 저하로 수소 탄생. 별에서 만들어진 산소 탄소 질소 마그네슘 철 원소들. 지구의 일부가 된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때로는 구름, 때로는 공룡, 때로는 흙이나 빗물이 된다. 흙에서 빗물을 마시고 자라난 밀과 사과. 밀과 사과로 만든 애플파이를 씹고 소화시켜 몸의 일부로 만드는 인간의 몸. 10의 28승, 억의 억의 조 개에 달하는 원자들의 집합. 그러나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의 98%는 1년 안에 다른 원자로 교체. 내장 표면의 상피세포는 5일, 피부는 2주, 피 속의 적혈구는 120일마다 교체. 뼈는 10년, 근육도 15~16년이면 모두 교체. 인간이 죽으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 분해된 원자들은, 탄소 질소 산소 수소들은 다시 흩어져 꽃이 될 수도, 숲이 될 수도, 짐승의 몸이 될 수도, 다른 사람의 몸이 될 수도 있는. 한때 세익스피어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한때 아인슈타인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당신 몸속의 원자. 한때 우주를 떠돌던 엄청난 수의 원자들이 지금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배열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당신. "애플파이는 수소 산소 탄소 등으로 되어있다. 만일 당신이 아무런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애플파이를 만들려고 생각한다면 먼저 우주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칼 세이건」- 지식채널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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