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2

노트 2016. 8. 12. 11:27
19. 양평에서부터 내 몸을 보살펴주었던 간병사 미음이 그만두었다. 아홉 달 동안 함께 했는데 이젠 좀 쉬고 싶다고 했다. 한 달에 이틀만 쉬는 강행군이었으니 심신에 피곤이 쌓였을 터이고, 새벽 5시에 시작되는 똑같은 일상과 똑같은 얼굴이 지겹기도 했으리라.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근력이 좋고 경력이 오래되어 못하는 게 없었다. 말없이 성실하고 정확하고 한결 같았다. 보름 푹 쉬고 다시 간병계에 몸 담을 거라 했다.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새로운 사람을 구해야하나 고민하다 이참에 독립하기로 했다. 어차피 스스로 간수해야 할 몸이 아닌가. 험난할 것이다. 특히 배설과 목욕이 난관일 것이다. 분명 시행착오를 겪을 테지. 힘든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떨어져 다치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17. 틱낫한이 말한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무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만물은 새롭게 탄생하지 않고 지속될 뿐이라고. 그 어떤 것도 무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무로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생과 사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고. 생과 사는 단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불과하므로 진리일 수 없다고. 에너지의 한 형태는 오직 에너지의 다른 형태가 되어 지속하므로 우리의 인생은 지속하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내 인생은 '나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서의 삶'이라고.

15. 휴일 오후의 한가한 물리치료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토카타를 들으며 창가 기립기에 의지해 서 있다. 고만고만한 연립주택들이 빼곡한,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을 무심히 내려다 본다. 몇몇 옥상에서 이불이 넘실대고 옷들이 펄럭이고 그늘막이 출렁인다. 바람이 불고 있구나. 순간, 한 풍경이 떠오르더니 자라난다. 바닷가 낮은 언덕의 집.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수평선. 흰 배가 지나가고. 갈매기들이 따르고. 햇빛과 그늘과 그림자. 포터블 스피커에서 굴드가 피아노를 치는. 바람에 홑이불과 가벼운 옷들이 날리고. 바지랑대와 평상. 낮술을 마시며 굴드처럼 흥얼거리는. 앉아도 좋고 서도 좋은. 전형적이어서 눈물 나는. 풍경.

13. 검은 셔츠에 검은 쟈켓. 검은 머플러. 검은 바지와 검은 구두.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 익숙한 차림새로 온 그가 다리를 꼬고 마주 앉아 있다. 한때 열렬했던 그와의 거리가 해왕성처럼 멀다. 알겠다. 그는 내 불구를 위로하려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기에 왔었음을 증명하는 중이다. 그가 일어나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신의 가호를 빌고는 돌아선다. 그는 할 일을 다 했으니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다 할 것도 그가 내게 소홀하다 할 것도 없다. 서로 다정하여 없이 못 살 것처럼 굴 때도 있었으나 인연도 피고 지고 오고 가는 것. 그저 이렇게 한 인연이 스스로 그러하게 저물어 갈 뿐이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등에게 인사한다. 안녕, 당신의 우주에서 행복하시라.

12. 히읗씨가 보내준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수유리에 있을 때 읽으려 펴보았었다. 전혀 읽히지 않았다. 흰 종이 위를 줄지어 가는 개미떼의 수를 세는 것과도 같은 지경이었다. 난독. 활자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덮어두었었다. 얼마전 그 책을 다시 집어들어 읽고 있다. 낯선 철학적 개념들과 끊임 없이 이어지는 추상명사들의 향연, 잡히지 않는 비유들에 치이면서 더디게 나아가지만 이제야 조금씩 읽힌다. 베르그손의 철학을 풀어 소개하는 편역자 김재희의 글을 어렵사리 이해하며 책을 반쯤 읽어 내려가다, 이런 복잡한 논리로 이론을 세우고 증명해내는 철학적 노고는 그 끝에 구체적 삶과 연결하여 어떤 '그 무엇'을 밝히고 보여주기 위함일까, 생각하는데 마침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책을 권한 히읗씨의 마음도 여기 있을까?
"생명체로서의 우리 자신은 신체라는 물리적 조건의 한계 속에서 삶의 요구에 따른 습관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그러나 우리의 지각과 기억 역량이 단지 생물학적 종의로서의 보편적 습성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꾸려가는 현실적인 삶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정도에서 습관에 차이를 도입할 수 있다면, 그래서 늘 보던 것만 보고 늘 하던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낯선 것을 발견하며 보다 풍부하게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며 풍요로워질 것은 분명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주의하는 노력과 기억의 강도에 따라 정신적 삶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험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말할 수 있게 한다......「물질과 기억」은 무엇보다도 습관을 넘어서는 우리의 사유 역량을 긍정하게 하고, 나아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경험의 장이 확장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창조적인 삶의 미래를 개방할 수 있게 한다." -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김재희/베르그손/살림/2008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091  (4) 2016.09.02
16083  (2) 2016.08.21
16081  (0) 2016.08.02
16073  (4) 2016.07.21
16072  (0) 2016.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