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3

노트 2016. 8. 21. 17:01
31. 코끼리를 타며 하현우가 부르는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듣는다. 원을 꼬드길 때 불렀던 노래. 결혼 후에도 간혹 원을 달래며 불렀던 노래. 따라 부르다 고단했던 '그때'들이 떠올라 울컥한다. 왜 내게로 와달라고 그리 목청을 높였던 걸까.

28. 소나기가 쏟아진다. 수평선부터 왔을까.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건너 왔을까. 도시를 차례 차례 적시며 여기 왔을까. 병원 마당에서 피고 지는 파문을 보는데 엄마와 아이는 안녕 안녕, 굳이 소나기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바퀴에 앉아 그 뒷모습을 본다. 둘은 비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수평선으로 갈 것 같은 자세로 걸어간다. 비처럼 간다.

26. 새가 장막의 세계로 날아든다. 장막은 수백 수천. 부드러운 것도 메마른 것도 말랑한 것도 가시 난 것도 어여쁜 것도 매끈한 것도 어두운 것도 투명한 것도 더러운 것도 붉은 것도 낭창한 것도 매콤한 것도 칙칙한 것도 구멍난 것도 두꺼운 것도 휘청거리는 것도 달콤한 것도 빛나는 것도 젖은 것도....... 새는 하나도 같지 않은 형용사로 묘사된 장막을 하나 하나 콕 콕 찔러본다. 장막은 수백 수천. 부리질은 수천 수만. 새의 부리는 조금씩 짧아져 간다. 새에게 장막은 새롭고 아름답고 그 맛이 색다르다. 부리가 닳도록 발톱이 빠지도록 모르고 장막을 쫀다. 주어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형용사만 맛보고 있다.

23. "깜깜한 우주에 오직 두 개, 굴드와 피아노만 보인다......굴드의 은둔은 자기 방식의 적극적 삶이었다. 그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재능이나 명예, 불후의 음반 따위가 아니다. 짧고 알찬 삶.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그의 은둔은 사랑하는 음악과 단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고, 당연히 외롭지 않았다." - 정희진
미셸 슈나이더가 쓰고 이창실이 옮긴 책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소개하는 정희진의 글에 혹해 며칠째 글렌 굴드를 듣고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토카타 등 바흐의 곡을 주로 듣는다. 굴드는 바흐와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하다.

21. 가볍게 웃으며 읽으라고 스님이 보내준 류시화의「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때로 킥킥거리며 보다 글쓴이가 인용한 바바 하리 다스의 글을 읽곤 울컥한다.
"어떤 자는 여행을 하도록 숙명적으로 태어난다. 그는 남루한 옷에 낯선 장소의 고독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가 오랜 시간대에 걸쳐 별들을 여행한 것처럼 이 지상의 여러 마을들을 통과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 늘 망설이고 망설이기만 했을까. 꿈을 꾸다 일상에 걸려 넘어지면 왜 도리어 안도했을까. 유일한 바람이 있다면 그건 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길 위의 여행자라고 폼만 잡았을 뿐 왜 정작 한 번도 여행자로 떠나지 않았을까. 가다 두려우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멈추기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늘 누군가의 엉덩이를 좇으며 살았을까. 여행자는 애초에 내 숙명이 아니었던 걸까. 여태 여행하지 않았던, 이제는 할 수 없게 된 여행 희망자의 울컥한 심사를 이런 상념들로 북돋으며 폭 폭- 한숨을 쉬는데, 한 생각이 번득 떠오른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여행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092  (0) 2016.09.11
16091  (4) 2016.09.02
16082  (0) 2016.08.12
16081  (0) 2016.08.02
16073  (4) 2016.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