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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6. 1. 10:50

10. 나는 국립재활원에서 생애 첫 장콜을 타고, 원과 아이는 양평에서 전철을 타고 와 경인미술관 뜰에서 만났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전시를 감흥 없이 훑어보고 점심을 먹고 운현궁을 산책했다. 경사로는 원이 맡았고 평지가 나타나면 온이 내내 휠체어에서 떨어지지 않고 밀어주었다. 만만한 길에서 온은 "터보 부스터!"라 외치며 힘껏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기도 했다. 온에게 물었다. 휠체어 탄 아빠랑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게 어떠하냐고. 온이 대답했다. "아빠가 힘들고 불편해서 죽을까봐 걱정돼." 한낮에 헤어져 원과 온은 양평으로 떠나고 나는 수유리로 돌아왔다. 벌건 대낮의 이별은 서먹하고 먹먹했다.


06. 여덟 달 만에 한 방에서 함께 뒹굴고 놀고 먹고 잠들고, 나들이 하고 외식도 하며 지낸 이박삼일이 막을 내렸다. 헤어지려 할 때 온이 내게 안기더니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의외여서 당황스러웠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아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감언이설로 달래도 그치지 않았다. 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꼭 껴안고 다독이며 아이와 나를 진정시키고 차에 태웠다. 잘 가라 인사하니 누워 훌쩍이며 온이 말했다. "나 슬프게 갈 거야." 집에 도착한 원이 전화했다. "잘 왔네요. 아들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 양평에 다 와 깼어. 어서 돌아오소. 나도 아들도 벌써 당신을 그리워하네."


04. 사회 복귀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스마트 홈' 체험 첫 날. 아이와 함께 딱지치기와 보드게임, 비누방울 놀이 등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 높낮이가 조절되는 씽크대에서 고기를 볶고 계란을 찌고 갖가지 쌈채소를 씻어 세 식구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 원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말한다. "사람들이 행복에 집착하다 못해 치이며 사는 건 아닐까 싶어. 다치고 나서 요즘 정리되는 생각 중 하나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건 애초에 없다는 것. 행불행은 다만 관념일 뿐이고 나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말을 더 이으려 하는데 와구와구 밥을 먹던 온이 끼어든다. "아빠. 행복은 있어요. 확실히 있어." 아차, 아이가 있었구나. 하던 말을 거두고 온에게 물었다. "그래? 온이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어떨 때 그런 생각이 들어?" 온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금 우리 가족 셋이 같이 밥을 먹고 있잖아. 그러니까 행복이 있는 거지." 순간 생각했다. 행불행이라는 건 없다고 확신하며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도 집착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또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거두고 느끼니 지금 여기, 행복한 걸? 온, 네가 스승이다.  


02. 이른 밤, 원과 통화하고 아이의 안부를 물으니 노래 동영상 시청 중이시란다. 엊저녁부터 국악동요인 놀리는 노래, 응가노래, 나무노래에 꽂혀 듣고 또 듣더니 거의 외웠단다. 원이 온을 불러 아빠에게 노래 좀 들려드리라니, 처음에는 살짝 빼다 세 노래를 연달아 불러준다. 국악 창법을 흉내 내며 쑥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귀엽다. 마지막 레퍼토리는 '모두가 꽃이야'. 원과 온이 함께 부른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둘이 붙어 앉아 휴대폰에 대고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니 울컥한다.


01. 허벅지에 전기 패드를 붙이고 앉아 창 밖을 본다. 벚나무와 잣나무, 떡갈나무의 검은 녹음들 사이로, 마치 동굴의 출구처럼  멀리 환하고 화사한 양지의 풀밭이 보인다. 애기똥풀이 점점이 피어있는 그 풀밭 위로 흰나비 둘이 참 가볍게 날아다닌다. 햇살의 한 조각인 것처럼, 세상의 저편에서 오는 신호인 것처럼 살랑 살랑. 문득 아이가 불렀던 노래, 청량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힘주어 부르던 그때의 노래가 떠오른다. '나비아 나비아 이이 나아 오너아. 노안나비 힌나비  추믈 추며 오너아. 봄바암에 꼰입도 방긋방긋 우스며 참새도 잭잭잭 노애하며 춤춘다.' 불과 5년 전쯤의 일인데 까마득한 옛날, 색다른 우주에서 있었던 전설의 머리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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